생각의 군더더기
생각의 군더더기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9.06.10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출옥 후 쓴 첫 번째 문장은 ‘감옥 문을 나왔다’였다. 이 문장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무표정한 글귀에는 온갖 팩트와 심중이 오롯이 담겨있다. 소설가 김훈은 ‘뼈를 발라낸 명문(名文)’이라고 했다. 그렇게 감탄한 김훈이 쓴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였다. 그는 이 11자(字)를 쓰기 위해 며칠 밤을 고민했다. ‘꽃이’로 할지 ‘꽃은’으로 할 것인지 조사(助辭) 한 글자를 놓고 숙고한 것이다. 이는 빛나는 결과를 낳았다. ‘성웅’ 이순신이 ‘인간’ 이순신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듯 글은 한글자만으로도 유명을 달리한다. 버려지거나, 살아남거나, 말도 그러하다.

▶우린 살면서 수없이 많은 군더더기를 만든다. 쓸데없는 말들을 쏟아놓고, 하잘것없는 생각들을 양산한다.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 오해와 질투, 시기와 미움 등등. 이런 것들은 입심 좋은 서사(敍事)에 불과하다. 사족(蛇足)이다. 그런데 이런 군더더기들 때문에 괜한 걱정에 사로잡힌다. 사서 걱정하는 것이다. 걱정의 90%는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걱정도 삶의 군더더기이고, 생각도 군더더기다. 모든 불행과 불화의 시작은 입(口)에서 출발한다. 말(言)에 사족을 붙이고 사견을 담는 순간 진실은 뒤틀린다. 곱게 볼 일이 아니꼽게 돌변하는 것이다. 하물며 전쟁도 그렇게 시작됐다.

▶요즘 가장 큰 걱정은 ‘걱정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걱정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흔들린다. 서늘한 바람에도 흔들리고 알량한 밥에도 흔들린다. 누군가는 ‘늙어가는 징조’라고도 하고, ‘늙기의 기쁨’이라고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뱃속 편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춘기, 사추기를 지나 오추기인데 무엇이 기쁘랴. 늙어가는 것은 불편함이다. 새로운 것들을 봐도 전혀 새롭지 않다. ‘본다’와 ‘보인다’의 차이다. 지금까지 봐왔다면 지금은 보인다. 세상에 투영된 누추하고 낡은 것들이 보인다. 문제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심술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지 못한 '것'들을 보면 화가 난다. 무언가를 지독하게 탐하는 '것'들을 보면 화가 난다. ‘우리’라는 말을 썼으면 좋겠는데 ‘나’와 ‘너’로 구분해 실리만 좇는 '것'들을 보면 화가 난다. 이런 ‘것’들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문장으로도 해독될 수 없다. 알고 당하는 분노다. 어쩌면 짜장면과 짬뽕,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놓고 갈등하는 가벼운 흔들림일 수도 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데 잔뜩 약만 오른 상태 말이다. 그렇다고 '짬짜면'을 시키지는 않는다. 이도저도 아닌 맛을 택하는 건 흔들렸다는 뜻이니까. 다소 마음이 슴슴해지더라도 허방을 짚지 말아야 다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똑같은 일들이 연속될 때 의도적으로 딴 길을 택한다. 혹시 하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샛길은 없다. 샛길에도 어둠은 있다. 이럴 땐 왼쪽, 오른쪽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야한다. 분노의 진앙 속으로 깊숙이 잠입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맞설 때 사그라든다. 살짝 흔들려도 좋다.


  • 세종특별자치시 마음로 14 (가락마을6단지) 상가 1층 3호 리더스
  • 대표전화 : 044-863-3111
  • 팩스 : 044-863-3110
  • 편집국장·청소년보호책임자 : 나재필
  • 법인명 : 주식회사 미디어붓
  • 제호 : 미디어 붓 mediaboot
  • 등록번호 : 세종 아 00075
  • 등록일 : 2018년 11월1일
  • 발행일 : 2018년 12월3일
  • 발행·편집인 : 미디어붓 대표이사 나인문
  • 미디어 붓 mediaboot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미디어 붓 mediaboot.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ediaboot@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