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라면'이 없었더라면
만약 '라면'이 없었더라면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9.06.24 0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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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는 연애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던진다. “라면 먹고 갈래?” 그걸 보고 난 라면 두 개를 끓여먹었다. 몸에서 사랑이 부풀어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불어터진 것이다. ①물 550㎖(2컵과 3/4컵)에 건더기스프를 넣고 물을 끓인다. ②분말스프를 넣고 면을 넣은 후 4분간 더 끓인다. ③김치, 파, 계란 등을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라면봉지 조리 설명서> 지금이야 물 550㎖과 4분이 중요하지만 그때는 눈대중으로 끓였다. 적당히 끓여 적당히 불어터져야 맛이 좋았다. 바싹 말라버린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MSG 국물 맛, S자로 배배꼬인 면발, 어쩌면 배배꼬이고 불어터진 세상에 대한 야유 같았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이상의 음식, 그 저렴한 위로는 서민의 정서에 착근했다.

▶한국인들의 라면 사랑은 놀랍다. 1인당 연간 소비량 73개, 국민전체로 보면 1년간 37억개다. 라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그 안쓰러운 것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라면은 한국사회의 그림자이자 청춘의 주검이다. 3년 전 지하철 사고로 숨진 청년의 가방에서 컵라면이 나왔다. 19세 청년은 컵라면 하나 먹을 시간 없이 종종거리며 목숨 걸고 혼자 일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노동자 김용균 씨의 유품에서도 컵라면이 나왔다. 컵라면은 김 씨가 식사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꽃다운 청년들에게 라면은 끼니이자 희망이었기 때문에 라면을 먹으며, 라면 살 돈을 벌었던 것이다.

▶인스턴트 라면이 식탁에 오른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이다.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가 1958년에 닭뼈 육수 맛을 낸 ‘치킨라멘’을 개발했다. 그는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건면(乾麵)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니던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에 전파된 중국 요리 납면(拉麵·라미엔)이 라면의 원조라는 설도 있다. 1963년 9월 15일, 라면은 대한해협을 건너와 보릿고개를 넘게 해줬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산업전사들은 라면을 먹으며 한국을 살렸다. 그리고 인스턴트 세상을 열었다. 빨리빨리 끓이고, 빨리빨리 먹고 난 뒤, 빨리빨리 찍어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먹던 라면은 가난한 사람들의 허기를 달랜 이후 다시 청춘의 품으로 돌아왔다. 혼자 일하고, 혼자 잠자고, 혼자 먹는 ‘나홀로족’들의 끼니가 된 것이다. 아, 돌고 돌아 청춘이다.

▶라면은 ‘감칠맛’이다. 제5의 맛인 감칠맛을 내는 MSG(글루탐산나트륨)는 짠맛, 단맛, 쓴맛, 신맛을 초월한다. 해롭다는 논란이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동물, 식물 등 단백질 성분의 자연 먹거리에도 대부분 존재한다. 모유, 우유에도 들어있다. MSG는 ‘발효’다. 맛을 익히고 미각을 익힌다. 또한 눈물을 발효시키고 가난을 발효시킨다. 여전히 라면의 가벼움은 삶의 무게보다 우월하다. 라면은 벗이고, 밥이고, 법이다. 만약 라면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뜨거운 입김 불어가며 기다리고 있는 동지는 거룩한 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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