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양말과 어머니
구멍 난 양말과 어머니
  • 최진섭 기자
  • 승인 2018.12.3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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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살이가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해도 그냥저냥 살아가는게 인생살이가 아닌가했는데, 요즘에는 정말 생활이 퍽퍽함을 느낍니다. ‘작년엔 안그랬어?, 재작년에도 어렵긴 마찬가지였어.’라는 말이 술자리 안주가 된지는 오래됐지만 그건 그저 여러 안주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최근에는 그냥 한 번 뱉어보는 엄살로 받아들이기에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궁상이 켜켜이 쌓여 거대한 피로감이 된 듯합니다. 너도나도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 지인 한 분이 그러더군요.

“다 오르고 내 월급만 안 오른다는 말이 남 얘기가 아니었어. 이제는 정말 구멍 난 양말도 꿰매 신어야 할 판이야.”

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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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는다는 것! 정말 요즘엔 동화책에서나 나옴직한 얘기죠. 30~40여년 전만해도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는 것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입니다.

구멍 난 양말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기 힘겹다고 말하는 지인의 한숨 섞인 한마디가 양말 한 켤레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결혼식장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여름이 채 물러나지 않은 조금은 더운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롱 깊숙이 박혀 있던 양복을 꺼내셨고, 어머니는 투피스 정장을 입으셨습니다. 하지만 뭔가 어색한 조합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양복은 무척 더워보였고, 어머니의 투피스 정장은 말이 정장이지 상하의가 맞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날, 입을 수 있는 옷은 그것 뿐 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어색한 조합의 가족은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기름기 많은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올 때는 저녁 식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푸짐하게 음식도 챙겨 왔습니다. 나름 근사한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다리를 주무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어머니의 다리는 종아리 부분이 멍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구멍 난 양말 하나 버릴 수 없을 만큼 퍽퍽한 삶에 찌들었던 어머니는 그날도 늘어난 스타킹을 신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복숭아뼈까지 내려온 스타킹을 몇 번이고 쓸어 올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어머니는 아마도 그것이 창피하셨겠지요. 어머니는 종아리에 고무줄을 팽팽하게 졸라 스타킹의 흘러내림을 방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임시방편이 잠시잠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하루 종일 하고 있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웠겠지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였습니다. 다소 더운 날씨에 겨울 양복을 입고 땀을 흘리던 아버지도 퍽퍽한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러웠겠지요.

“스타킹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냥 하나 사 신지, 그 궁상을 떨고…… 에이.”

그렇게 아버지는 하루 종일 더웠을 양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다리를 주무르시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나가는 뒷모습에 대고 애써 태연한척 말했습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요. 잠깐 피가 안통해서 그런거지. 그나저나 아무리 돈이 없어도 당신 여름 양복은 하나 사야겠어요. 으이그, 더우면 잠깐 벗어놓지. 융통성이 없어 사람이.”

참 누가 융통성이 없는지 모를 일이지만, 구멍 난 양말, 늘어난 스타킹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훈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힘겹게,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듯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말연시, 치솟는 물가에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서민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년에는 구멍 난 양말에 대한 기억이 훈훈한 옛 추억으로 되살아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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