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반환점 앞 ‘두 쪽 난 광장’ 국민 모두 섬기겠단 약속 잊었나
文정부 반환점 앞 ‘두 쪽 난 광장’ 국민 모두 섬기겠단 약속 잊었나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9.10.0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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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필 칼럼-문방사우]대통령은 국민의 물음에 답하라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둘로 나뉘었다. 광장에서 얘기하는 사람과 광장을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런 사회분열을 절묘한 팩트로 폐부를 찌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한에 환멸을 느껴 자진 월북한 인물이다. 아버지의 업보로 인해 밀실에 갇혀 살던 자식(주인공)은 빨갱이로 몰리며 갖은 고초를 당한다. 결국 밀실과 공권력 사이에서 선택한 건 월북이었다. 하지만 북한 사회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회주의 제도의 생경하고도 공허한 구호만이 있을 뿐 기대했던 인간적 소통과 정의로운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6·25전쟁에 뛰어들었지만 그곳 ‘광장’에도 의미 없는 학살과 죽음, 개인을 짓누르는 폭력과 명령만이 횡행했다. 포로가 된 주인공은 송환과정에서 남과 북이라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끝내 중립국을 선택한 그는 인도의 상선 ‘타고르’호에 올라 남지나해를 지나던 도중 바다에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남과 북의 광장에는 이념만이 도사릴 뿐 어떤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최인훈 선생이 말한 ‘광장’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주인이 되는 세상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동질감을 느끼며, 억압받지 않는 공간, 그게 광장이었다. 광장은 밀실의 대척점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자유의 너른 들판이 광장이다.

▶청와대가 침묵하는 동안 ‘서초동’과 ‘광화문’만 시끄럽다.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쪽과 조국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다. 이들 어느 쪽도 옳지 않다. 그렇다고 틀리지도 않았다. 다만 다를 뿐이다. 광장에 남은 것은 두 쪽 난 대한민국의 진영과 이념이다. 지금의 ‘광장’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광장이 아니라 밀실이다. 사방이 벽으로 격절된 공간일 뿐이다. 자신들은 ‘광장’에 섰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그들처럼 밀실에 갇혀 국가존재를 위협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며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대통령은 지지했던 사람만 섬기고,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섬기지 않는 태도다. ‘광장’의 촛불로 인해 탄생한 정권이 ‘광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광장은 소통의 장소다. ‘어울림’이 춤추는 대의정치의 표상이다. 광장은 다수를 리드미컬한 공동체로 만든다. 같은 밥을 먹지 않았어도,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하나가 되는 통로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똑같이 굿판을 벌이는 드넓은 마당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장이 선동의 장소로 왜곡되며 죽어가고 있다. 광장에 나부끼던 정의의 횃불은 사라지고, 구호와 시뻘건 깃발만이 펄럭이고 있다. 관심과 무관심의 공허한 촛불을 켠 채 광장은 뙤약볕에 그을리고 있을 뿐이다. 정치는 광장이 아닌, 국회 안마당에서 해야 한다. 옛 자유당 시절 영국의 더 타임스는 ‘쓰레기통에서는 장미가 피지 않는다’며 한국 민주주의 가능성을 폄훼했다. 군사정부에서는 결코 민주주의를 일궈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광장에 뜬 검은 깃발은 핏빛으로 물들며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정권 고위층에 대한 로비와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1980년대에 ‘전부 도둑놈들’이란 말이 유행했다. 탐욕과 탐관의 시대에 어느 놈 하나 제대로 된 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만 있고, 민심을 챙기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정치도 진화하지 않고 있다. ‘반대 목소리를 듣지 않는’ 여당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만 외치는 야당이나 오십보백보다. 기득권의 야만을 즐기며 독불장군처럼 구는 여당이나, 뒷북치며 광장으로 뛰쳐나온 야당이나 거기서 거기다.

▶“나도 나카소네가 싫지만 오야붕이 오른쪽이라면 오른쪽, 왼쪽이라면 왼쪽이다. 그게 싫으면 떠나라.” 1982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의원 총회서 나온 말이다. 일본의 뿌리깊은 ‘오야붕(親分·보스)·꼬붕(子分·계보원) 정치’의 대표적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치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야붕·꼬붕정치가 판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에 이어 친문과 반문, 조국과 비조국만이 존재한다.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많은 곁가지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 곁가지는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그냥 곁가지 일뿐이다. 곁가지는 눈엣가시여서 싹을 잘라줘야 가지가 더 굵고 튼튼하게 자란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도 눈엣가시다. 국민들이 광장으로 뛰어나가는 것은 광장에서 뭔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뛰어나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이다. 광장에서라도 소리를 쳐야 살 것 같아서이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돌고 있다. 그런데 헛돌고 있다. 지금쯤이면 그가 꿈꾸었던 청사진들을 되돌아보고 남은 과제는 뭔지, 평가와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게 정상이다. 국민들 역시 정부의 공과를 따지며 사실상 중간평가를 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국정농단과 헌정유린을 자행한 박근혜 정부를 탄핵하고 탄생한 ‘촛불정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평등·공정·정의가 물결치는 차별 없는 세상과 이념·지역·계층·세대로 갈라진 국민이 한마음으로 통합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특권과 반칙만 남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택했던 경제는 길을 잃었고, 총동원령을 내렸던 한반도 평화는 오리무중이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은 자신들이 ‘잘나서’ 그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 ‘못난 야당’ 덕분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내로남불식 정의가 사그라지고 있다. ‘조국’이 아니어도 사법·검찰개혁은 굴러간다. 촛불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던 사람이 그토록 많은 도덕적 흠결과 법적 의혹이 있는 사람에게 목을 매는 이유가 뭔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던 사람이 오히려 국민을 두 동강내고 있다.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미쳐가고 있는데 침묵하고 있다. 우상이 된 촛불로는 남은 임기를 채울 수는 없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겁게 받아들여야한다. 얼룩말은 순해 보이지만 한 번도 길들여져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어찌 그리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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