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아련한 기억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아련한 기억
  • 최진섭 기자
  • 승인 2018.12.02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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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靜劑(진정제)

ㅡ마리 로랑생

따분한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슬픈 여자랍니다.

슬픈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병든 여자랍니다.

병든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버림받은 여자랍니다.

버림받은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고독한 여자랍니다.

고독한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쫓겨난 여자랍니다.

쫓겨난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죽은 여자랍니다.

죽은 여자보다 불쌍한 것은 잊혀진 여자랍니다.

마리 로랑생
마리 로랑생

프랑스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스, 1883-1956)은 생전에 ‘죽는 것 보다 잊혀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잊혀진다는 것! 정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일까요?

적당히 식은 커피를 입에 머금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마리 로랑생이 읊조린 ‘잊혀짐과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철이 덜 난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잊혀짐’과 ‘죽음’, 두 가지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주제로 다가옵니다.

그래도 잊혀진다는 것이 헛헛한 슬픔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느껴지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것들이 조금씩, 때로는 순식간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어느 순간 잊혀져 버린, 또는 잊혀져 가고 있는 아련한 것들에 대해 추억을 더듬어 볼까 합니다.

오늘은 공중전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공중전화 찾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역이나 터미널에 가야 겨우 찾을 수 있죠. 공중전화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들은 많지만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공중전화에 대한 한 토막 기억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공중전화와 동전 두개
공중전화와 동전 두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어머니는 구두 공장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어린 아들이 학교가 끝난 후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집에 잘 돌아왔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매일 아침이면 제 손에 20원을 쥐어주셨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집 앞 구멍가게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구두공장으로 전화를 해 귀가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우리 집은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집에 전화기가 없었습니다. 매일 집에 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구멍가게 앞으로 달려가 전화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구두공장으로 전화를 하면 어머니는 “밥은 아랫목에 있고, 찬장에 김치하고 반찬 해놨으니 챙겨 먹고, 숙제부터하고 놀고, 오늘은 구구단 5단까지 외우고…….” 하여간,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매일하는 잔소리인데도, 어머니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셨죠.

그러던 어느날, 그날은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평소처럼 가방을 던져놓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구멍가게로 달려갔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빨리 귀가 보고를 하고 돌아오려는 마음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뛰기 시작했는데, 한쪽 신발이 벗겨지는 바람에 진흙탕에 철퍼덕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진흙탕에 자빠진 것 까지는 괜찮았지만 ‘이런 젠장’ 넘어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흘린 것입니다. 다행히 동전 하나는 찾았지만 하나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멍가게 주인 아저씨께 10원을 빌릴 숫기도 없던 저는 결국 장대비를 흠뻑 맞으며 공중전화 주변을 맴돌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일단 숙제부터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요? 어머니가 비를 흠뻑 맞은 채로 집으로 오셨습니다. 매일 귀가 보고를 하던 아들이 전화가 없으니 걱정이 되셨나봅니다. 전 혼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혼내는 대신 밥상을 차려주시고, 별 말씀 없이 구두공장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저에게 40원씩을 주셨고, 저는 집에 전화기를 설치할 때까지 약 4년여간 유리병에 귀가 보고를 하고 남은 20원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았던 동전들은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동전을 잃어버리고 애가 타는 모습으로 흠뻑 비를 맞고 있는 그 시절의 어린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 속에 있습니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공중전화’라는 단어 자체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30대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중전화에 대한 추억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가득 넣어둔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뒷사람 눈치를 살피던 매너 없는 아저씨,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뒷사람에게 동전 하나를 부탁하던 아줌마, 전화가 끊기기 전 ‘사랑해’ 외치는 순수 총각, 약속한 친구가 언제 집에서 나갔는지 확인하는 학생, 술 취해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든 아저씨, 수화기를 붙들고 우는 군인 아저씨……, 공중전화는 사라지고 있지만, 공중전화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은 여전히 술 안주가 되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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