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행복의 가치가 된 세상
아파트가 행복의 가치가 된 세상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9.12.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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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외딴집은 둔덕 위에 있었다. 붉은 기와로 이어붙인 지붕은 햇볕과 비를 막기에 충분했다. 방 3개, 부엌, 창고가 한 틀에 포치됐다. 앞마당엔 장독대가 있고, 그 옆엔 토마토와 간단한 채소류를 길러먹을 수 있는 텃밭이 있었다. 집 뒤로는 소나무 숲이 있어 한풍을 막아주었고 비탈엔 사과나무가 홍조 띤 얼굴로 하늘을 떠받쳤다. 밤이 되면 등잔불을 밝혔고 작두펌프로 길어 올린 물은 달콤한 자리끼였다. 상추가 먹고 싶으면 열 보만 걸으면 뜯을 수 있었고 고추와 파, 마늘도 지근거리에 있었다. 집 앞에 '채소가게'가 있었던 셈이다. 아궁이에 장작 열 토막만 넣어도 등짝이 뜨끈뜨끈해 몸살기가 녹았고, 살문만 열어놔도 시원한 통풍에 더위가 달아났다. 지금도 어느 봄날,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푸성귀 가득한 녹색밥상을 먹던 기억과 달큼한 오수를 즐기던 때가 그리워진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한 적이 있다. 플라멩코의 나라 스페인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41개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장장 25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유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루 8630명만 관람할 수 있는 세계 최초 시간제 입장이다.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은 129년째 신축 중이고, 가톨릭의 총본산 톨레도 성당은 266년 만에 완성됐다. 수백 년 공들여 짓다보니 건물의 수명도 수백 년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세비야까지(450㎞) 가는 동안 가장 이채로웠던 것은 성냥갑 아파트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들 아담하고 예쁘게 만든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대서양의 푸른 하늘 아래로 삽상하게 울려 퍼지는 파두(Fado)의 애절한 음색처럼, 사람 사는 집이 정말 사람다웠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에는 똑같은 건물이 없다. 하나하나의 건물이 예술적인 조각품이다. 건물의 모퉁이마다 물과 화초, 분수를 세워 마치 하나의 정원을 연상케 한다. 중국경제의 상징으로 떠오른 상하이의 푸둥지구도 30층 이상의 빌딩들이 1000여 개가량 들어서 있지만 닮은 게 없다. 역사가 오랜 유럽의 도시들과 미국의 대도시들도 건축미가 일품이다.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설계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다 보니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도시 풍경은 어딜 가나 붕어빵이다. 제멋대로 지어진 건물들이 '키자랑'만 한다. 눈높이에 맞추지 않고 돈 높이에 맞추다보니 생긴 일이다. 우리나라 주택의 건물수명을 길게 잡아 40년 정도라 치면 매년 다시 지어야 하는 집이 약 40만 채에 이른다. 결국 우리나라는 적어도 매년 70~80만 채의 집을 꾸준히 지어야만 본전치기고,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집값이 폭등하거나, 혈압이 폭등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흙과 나무로 된 집은 콘크리트 집 수명보다 10배나 길고, 나중에 허물어지더라도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도 자연이고 나무도 자연이기 때문이다. 봄비 내리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녹슬어 구멍 난 함석 처마 사이로 빗물이 떨어진다. 댓돌 위에 물이 튄다. 조금씩 미풍을 타고 마루 위까지 덤빈다. 그 빗방울은 차갑지 않다. 우리는 쪽마루에 앉아 꿈을 꾼다. 희망을 꿈꾼다. 하지만 지금의 집은 박대하다. 아파트 주차장 사이를 5㎝만 더 넓혀주더라도 마음의 행간이 넓어질 텐데 그렇지 못하다. 편리함과 불편함 사이에 있는 아파트. 바지랑대에서 나비처럼 펄럭이던 옷들이 가슴속에서 사라진 것은 불행이다. 요즘 따라 등 따스운 구들장 방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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