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나그네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58. 나그네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 미디어붓
  • 승인 2020.05.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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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박을 하다 어둠이 찾아오면 그 적막함은 쓸쓸함을 넘어 무섭기까지하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다. 숲은 정통성과 시원의 순결을 옹위하고 있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때문에 숲에서는 길을 잘 기억해둬야 한다. 땅거미가 어두워지면 길은 불투명해진다.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에도 빛의 편차가 생긴다. 길은 어디까지나 빌린 것이기 때문에 빌려준 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가장 인상적인 풍경과 자잘한 근심거리는 항상 포개지기 마련이다. 길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어둠속에서 불안했던 기억과 어찌할 바 모르는 무력감을 느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건 세상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럴 땐 지나온 길을 얼추 짐작해가면서 기억을 되돌려야 한다. 길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기분의 완급을 조절하면 길이 열린다. 기억의 복원력은 곧 담력이다. 헛간이나 갓 베어낸 건초더미에서 지낸 하룻밤, 외딴 곳에서 얻어먹은 식은 밥 한 덩이, 우연히 도착한 마을에서 때마침 잔치가 벌어져 동냥 아닌 동냥을 했던 기억. 비박은 숙박보다 덜 안전하지만 묘미는 더 있다.

나그네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삶이다. 호텔이라면 더없이 좋겠으나, 막(幕)만 있어도 좋다. 이슬을 피하고 잠을 청하고 요기를 할 수 있는 여관(나그네의 집·旅館), 여인숙, 모텔은 충분히 호사다. 여관이라는 관(館)은 결국 먹고 자는(食+官) 곳이다.

어느 낯선 포구의 여인숙에 깔린 축축한 이부자리, 기름때 전 베개, 낡은 벽지와 그 벽지에 새겨진 낙서, 좀약과 살충제, 싸구려 비누냄새가 묘하게 섞여 후각을 마비시키던 잠자리마저도 그리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때문에 잠시라도 들러서 환대를 받았던 모든 장소가 그날 밤의 종착지가 된다. 예컨대 임금의 여행은 순행(巡幸)이라 하고, 임금이 자주 다녀 빛을 본 곳은 다행(多幸)이라고 한다. 그 말의 어원이 솔깃해진다.

여행 출발 전에는 숙박과 비박의 비율을 2대8 정도로 계획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날씨가 좋으면 비박(노숙) 하고, 악천후 때만 숙박하기로 했으나 이 비율은 맥없이 무너졌다. 농활(農村奉仕活動)을 해주고 숙식을 해결하거나, 마을회관을 공짜로 빌려 숙박을 한다는 생각도 여지없이 깨졌다.

낯선 동네, 낯선 공간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익명의 존재가 되면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았지만, 어느 누구도 공짜 밥, 공짜 숙박, 공짜 농활을 제공하지 않았다. 한 뼘의 땅조차도 허락하지 않을 듯한 표정에서 절망만을 읽었다. 어쩌면 먼저 그들에게 절망을 읽혔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익숙한 골조 밖에서 자신의 얼굴, 이름, 사회적 지위를 모두 내려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사물들과의 적절한 거리, 상황에 따른 의도적인 권태가 평온함을 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운 것들이 많아진다. 북적거리는 선술집, 비바람 걱정 없는 둥지, 언제나 씻을 수 있는 집안의 수원지(水源地), 왕성한 식욕을 태연히 누릴 수 있는 게으른 부엌, 불온한 침입자들로부터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완고한 벽과 울타리, 꽃잠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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