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여행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그루잠 같은 것
59. 여행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그루잠 같은 것
  • 미디어붓
  • 승인 2020.05.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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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放浪)에는 지켜야 할 모종의 규율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면의 비관주의와 외면의 낙관주의 사이에서 싸워야 한다. 여행자의 처마는 하늘이고, 땅은 잠자리다. 응달과 양지가 따로 있지 않다. 산등성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물결치는 바람에도 결이 있듯, 자신의 관절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마음의 결을 유지해야 한다. 다음날 눈을 뜰 수 있다는 건 절망을 이겨낸 아름다운 훈장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방랑에 관한 그의 시(詩)에서 ‘완전한 인간이란 무심한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미동도 없이 부드러운 바람을 만끽하고 은은한 꽃향기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대나무와 같다’고 묘사했다.

여행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그루잠 같은 것이다. 물을 지독히도 싫어한다는 연잎이 물방울을 바로바로 비우지 않고 모아서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내는 것도 나름의 지혜다. 한 번에 모아서 비우면 잎에 묻은 자질구레한 먼지나 포자, 세균이 물방울에 말끔히 씻겨나가 깨끗해진 잎으로 광합성이 잘된다는 거다. 완벽하게 비우기 위해 연잎은 싫어하는 물을 안고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여행에 있어서 맛에 대한 탐미는 끝이 없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 것인가 하는 질(質)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먹고 어떻게든 마시면 된다.

요즘 사람들이 다 잘 먹고 잘산다지만 사실은 못 먹고 못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틀리게 먹고 틀리게 산다.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이 쌀보다 시래기나 풀을 많이 먹으니 변이 너무 거칠어져서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껍데기 훌렁 다 벗겨낸 쌀이나 밀가루 음식에 고기만 기름지게 먹으니 변비에 걸려 X구멍이 찢어진다.

여행 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래된 것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의 내공이 쌓일 때까지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 것 같았던 라이딩도 시간이 갈수록 셈법이 복잡해진다. 익숙했던 머릿속의 설계가 흐트러지고, 관례적인 도식이 허물어지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완의 길들만 보인다. 길은 감각과 지성을 깨우는 영원한 경계다.

라이딩을 하면 할수록 바람 또한 위태롭다. 마치 절벽 같다. 얕은 곳에서 차갑게 불고, 깊은 곳에서 칼날처럼 곧추선다. 바람에도 분명 층(層)이 존재한다. 휘몰아치는 듯 하지만 고요하고, 잠잠한 듯 하나 소용돌이친다. 그때마다 시간은 멈춰버린다.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나고, 멈추고, 다시 떠나고, 무엇 하나 방해받지 않고 가는데도 난처한 일들, 불편한 일들이 발목을 잡는다. 인간이란 외롭고 외로워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비로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제야 제대로 ‘나다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자각하기도 한다.

시나브로, 사위(四圍)가 어두워질 때쯤이면 길 끝의 휴식처가 설레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하다. 곧 만끽할 휴식의 기쁨과 식욕, 기대감보다는 곧 닥칠 추위와 배고픔, 낯섦이 앞선다. 중요한 것은 도착 지점이 아니라 매순간 일어나는 느낌, 찰나, 항상성, 유용성이다. 여행계획은 철저하게 고독해야 하고 단절은 완전해야 한다는 상식은 사실 문학적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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