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당한’ 인디언
67.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당한’ 인디언
  • 미디어붓
  • 승인 2020.08.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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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당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전북 부안 당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하리

“왜 하필 ‘당하리’지?”

너무 많이 당해서 체념한 것처럼 들리는 ‘당하리’ 지명은 전북 부안군 동진면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서 쓰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으로 바뀌었다. 평안북도 천마군 천산리의 서북쪽 안산 기슭에 있는 마을과 평안남도 평원군 신송리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도 당하리(堂下里)란 지명을 쓴다. 이처럼 당하리란 지명을 쓰는 곳은 모두 마을 뒷산에 서낭당과 같이 신을 모셔 두는 당집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상리(堂上里)는 당집 위에, 당후리(堂後里)는 당집 뒤쪽에, 당북리(堂北里)는 당집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유래됐다.

흔히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당했다’고 말한다. 성폭행, 성추행도 그렇고, 남이 몰래 뒤통수를 내리칠 때, 사기를 당할 때도 쓰는 말이다. 어른들은 남한테 해코지를 당하면 ‘그런 일만 없어도 사는데’라며 끌탕을 한다. 그만큼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다. 당하는 일은, 당하는 자의 숙명이 아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당하더라도 부도옹(不倒翁)처럼 일어서는 건 또다시 당하지 않겠다는 학습효과다.

“그 옛날에도 살아남았어. 그러니 지금도 다시 해낼 수 있을 거야/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으니 다시 한 번 할 수 있어 /폭풍우와 곰, 늑대와 백인들을 물리쳤지 /그러니 늙는 것도 물리칠 수 있을 거야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나는 양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어 /그러니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하던 일을 계속할 거야.”

나바호(Navajo: Indian 보호구역) 인디언의 시다. 이 시는 늙음조차도 이겨내겠다는 결의이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다’는 대목이 아리다. 인디언은 아메리카의 ‘주인’이었지만 정복자들에 의해 ‘주민’의 명맥만 붙잡고 있는 슬픈 종족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했을 당시 이곳엔 대략 150만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자신이 상륙한 바하마의 산살바도르를 인도 아(亞)(인도인·인디언) 대륙으로 착각한 콜럼버스는 미국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작 이 대륙의 주인이었던 토착민들은 이 말을 싫어한다. 이들은 ‘인디오(인디언)’가 아니라 ‘인디헤나(indigena; 원주민)’이기 때문이다.

부안 당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부안 당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300년 동안 남미를 지배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인종적 열등감을 심어 놓았다. 원주민의 유산은 미개한 것이며, 없애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잉카제국 시대의 수많은 신전을 부수고, 그 위에 가톨릭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도 없애려고 했다.

19세기에 미국은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호구역이라고 불리는 작은 지역에 부족들을 강제로 몰아넣었다. 대부분의 보호 구역은 황무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요 산물이 된 옥수수, 토마토, 감자, 담배 등의 곡물을 경작하는 방법을 유럽인들에게 가르쳤다. 인디언들의 다양한 발명품 중에는 카누, 눈신, 모카신(moccasin) 등이 있다.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미시간, 미시시피, 미주리, 아이다호 등 미국의 여러 주와 수많은 지명들도 인디언들의 단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린 편협하다. 곧이곧대로 믿는 게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사실상 반역이다. 박정희와 다를 바 없다. 조선(朝鮮)은 조선의 정통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고려의 정통성을 짓밟았다. 그런데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신라가 아군(我軍)이고 백제는 적(敵)이라고 규정한다. TV 역사드라마를 보면서 신라군이 백제군을 짓밟는 장면이 나오면 당연한 듯 통쾌해한다. 승자들이,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역사는 대부분 왜곡돼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인디언이 아니다.

침략자와 정복자들, 그리고 무참히 짓밟힌 원주민과 토착민들. 세상은 정복자에 의해 땅의 뼘을 넓혀가지만 정통성과 정체성은 결코 짓밟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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