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백수놀음’ 넘어진 김에 쉬어갑시다
79. ‘백수놀음’ 넘어진 김에 쉬어갑시다
  • 미디어붓
  • 승인 2020.10.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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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백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영광 백수리 이정표. 미디어붓DB

전남 영광군 백수읍이 갖는 지명은 유래와는 달리, 풍기는 단어만으로 아리다. 원래 구수(九岫)·영마(靈馬)·봉산면(鳳山面)이었는데 1931년 통합하면서 백수면이라 칭하였다가 1980년 12월 1일 읍으로 승격했다고 한다. 백수라는 지명이 붙은 연유조차 명확하지 않다. 백수읍의 상당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구수산이 아흔 아홉 산봉우리와 아흔 아홉 골짜기가 있다고 해서 백(百)에서 일(一)을 뺀 백수(白岫)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광읍과 해안을 잇는 도로가 동서로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다만, 지명만 보면 눈칫밥을 먹고 있는 백수들에겐 다소 불편함을 주는 매나니(반찬 없는 맨밥) 같다.

(……) 봄을 꽃잎에 재우면 향기 나는 여름이 되려나/여름을 꽃그늘에 묻어두면 달콤한 가을이 되려나/가을을 술독에 삭히면, 걸쭉한 겨울이 되려나/겨울을 눈바람에 녹이면 투명한 봄이 되려나//숙성의 사계절, 내키는 대로 그냥 봄 여름 가을 겨울/중년을 닮은 계절은 한 다발의 잘 익은 꿈, 잘 익은 시(詩).//

모든 청춘은 지루하고 모든 중년은 초조하다. 내일이 불확실한 젊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마냥 길고, 앞날이 빤한 중년들에게 시간은 총알 같다. 시간은 늙어간다. 소년 같은 봄바람이 불지만, 바람은 이미 중년이고 노년이다.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다. 떠남은 비움이고 비움은 버리는 것이다. 버리면 채워지고 낮추면 높아지는 이치와도 같다. 채우려면 비워야하고 가지려면 내려놓아야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주는 인생사 새옹지마의 교훈처럼….

아저씨 하면, 얼굴에 우수(憂愁)라도 잔뜩 끼어있어야 제멋이다. 봄 같은 소년, 여름 닮은 청년, 가을 같은 중년, 겨울 닮은 노년. 우리는 추억 속에서 살다가 망각 속에서 죽어간다. 매화꽃과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이면, 중년은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마치 감기증세 같다. 목구멍으로 봄이 넘어오면서 오한이 나고 알레르기가 돋는다. 그래서 봄은 앓고 있는 사람에게 먼저 온다. 온몸에 처녀의 푸른 치맛자락처럼 파릇한 나물 빛이 난장을 친다. 이때 자칫 쪽빛 하늘이라도 발견하면 푸른 눈물이 흐른다. 중년은 몸과 마음이 모두 신산(辛酸)한 인생의 정오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중간에 딱 멈춰버린 제2의 사춘기다.

논다고 해서 그냥 놀아서는 안 되고 ‘건강’하게 놀아야 한다. 조선 태조는 중년에 과음과 육식을 삼가고 고기반찬을 끊었다. 영조도 중년 이후 술 대신 생강차를 마시고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태조와 영조는 73세, 82세로 장수했다. 반면 세종은 밥상머리에서까지 책을 읽고 고기반찬을 즐겼다. 그는 100가지 병을 앓았고 48세에 세상을 떴다. 정조 또한 나이가 든 후 과·편식을 하고 식후 담배까지 피웠다. 그는 53세까지밖에 살지 못했다.

영광 백수리 전경. 미디어붓DB
영광 백수리 전경. 미디어붓DB

늘노리(경기도 파주시 파평면)/백수읍(전남 영광군)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시구절시구 차차차(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 -김영일 작사·김성근 작곡 ‘노랫가락 차차차’ 中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곡이다. 노랫말처럼 온갖 생물이 좋은 계절을 맞아 활짝 피어나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의 모습을 띠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을 맞으면 누구나 놀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특히 건달처럼 건들건들 놀면서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노라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육아에 지친 주부, 직장 일에 치인 직장인에게 ‘논다’는 것은 단순한 쉼의 가치가 아니라 완전한 휴식이자 삶의 방전을 막는 재충전이다.

기자로 살다가 백수가 된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일에 파묻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 시간이 보인다. 놀고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놀고먹으니 시간의 쓸모가 보이는 것이다. 백수는 일이 없다뿐이지 나머지 삶은 너무나 온전하다. 바이크 라이딩도 ‘놀고먹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 행복의 원천, 무한한 자유, 다시 시작하려는 꿈의 여정이었다.

백수라면 누구나 시(詩)를 쓴다. 생각을 쉬면 시인이 되는 까닭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24시간, 365일은 시의 밑천이다. 시도 익고 사람도 익고 세월도 익는다. 삶은 영원할 것 같지만 찰나다. 소년이었는데 금세 청년이고 돌아보면 금세 중년, 노년이다. 봄인 듯 하다가 금세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다. 계절도 늙고 사람도 늙는다. 마음은 봄인데 몸은 겨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가 주는 여운은 남다르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중의 하나는 열심히 사는 삶이고, 열심히 살았다면 재미있게 노는 것도 중요하다. 천지간 만발한 꽃은 찰나지만, 인생도 그보다도 더 짧기에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靑春極樂人生至樂(청춘극락 인생지락)’은 그래서 더욱 달콤하다.

파주시 파명면 늘노리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자연마을로는 개석동, 관곡, 구장터, 백석말, 서원말, 어의골, 용연말 등이 있다. 개석동은 마을에 흐르는 늘노천 지류인 개석천에 갯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백석말은 은행나무가 있어 행촌동이라고도 한다. 서원말은 무정산 남쪽의 파산서원 옆에 있는 마을이다. 우계서당과 청송보가 있는 마을이다. 용연말은 용연 위쪽에 있던 마을로, 파평 윤씨(尹)의 시조 윤신달이 나왔다는 용연 옆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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