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장만의 마침표였던 '문패'
집 장만의 마침표였던 '문패'
  • 최진섭 기자
  • 승인 2019.02.17 15: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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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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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네에 유독 크게 느껴졌던 주택이 있었습니다.

가끔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문패’를 올려다보며 ‘저런 집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문패가 달려 있는 집은 잘 사는 집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희미해져가는 기억이지만 문패가 있던 그 집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묵직한 철문 너머로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가 깔려 있고, 요상하게 허리를 비틀고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나름대로의 진열을 갖춘 채 보기 좋게 마당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소나무 안쪽으로는 여린 잔디를 육중하게 누르고 있는 넓적한 돌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친절하게 현관문을 안내합니다. 군데군데 커다란 돌덩이와 동물을 닮은 석상 몇 개가 당당한 모습으로 마당 풍경을 완성하는데 한 몫 거들고 있습니다. 빨갛다 못해 검은 빛까지 감도는 장미 넝쿨은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길 가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끔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멋진 털을 가진 시추 한 마리가 뛰어나와 우리집에 더 이상 가까이 오지마라는 듯 앙칼지게 짖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큰 집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마치 궁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허름한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집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파트건 주택이건 독채를 얻어 전세를 살지만 40여년전만해도 전세는 모름지기 주인집과 출입문을 함께 써야 전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칸짜리 방이든, 두 칸짜리 방이든 전세를 사는 사람들은 늘 죄인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리면 울어서, 아이가 좀 크면 떠들고, 뛰고, 장난쳐서 주인집 아주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일쑤였습니다.

간혹 전셋집에서 돌잔치를 하는 간 큰 세입자도 있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집 아주머니를 만나면 주인집 마루까지 얻어 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님들이 가고 난 후 시어머니가 보다 더 야박한 잔소리를 들어야했죠.

그래서 사람들은 내 집 마련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고,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이 생기면 문패부터 달았습니다. 분명 문패는 누가 사는 집인지를 알려주는 본래의 기능과 더불어 여기가 바로 ‘우리집’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자부심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문패를 애타게 보고 싶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세살이의 설움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만들었던 아버지 이름의 문패를 오랜 시간 남모르게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만들어 간직했던 문패를 결국 달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다섯 식구가 13평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아마도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문패에 대한 기억을 잊은 듯합니다.

이제는 문패를 다는 집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알아서 다 달아주거든요.

도로명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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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우편제도가 발달하고 편지의 내왕이 많아지면서 문패가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고 합니다. 우편제도가 활성화되면서 1900년대 초반에는 집집마다 문패를 달도록 법으로 정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난생처음 가는 곳도 쉽게 찾아갈 수 있으니 문패라는 것이 사실상 무의미해졌습니다.

내 집 장만의 마침표와 같았던 문패도 이제는 그저 추억의 한 페이지에 ‘그런 것도 있었지’ 하고 기억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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