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의 한줄기 단비같은~" 코로나 블루 치유 위해 詩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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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1.01.20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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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시인 ‘칸트의 산책로’ 출간…충북우수창작활동 지원사업 선정
권온 문학평론가 “인간의 본질 생각하고, 삶의 가치 성찰 기회“
최준 시인 ‘칸트의 산책로’ 출간. 최준 시인 제공
최준 시인 ‘칸트의 산책로’ 출간. 최준 시인 제공

시인(詩人)이란 그 자체로 운명이어야 한다. 가난해도, 풍족해도 시(詩)는 항상 강마르고 배고프다. 그래서 때로는 운명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천착하면서 시간과 통섭한다. 영악하고 계산 밝은 시인들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숭고한 정신성, 천진성을 가진 시인은 절멸의 시간대와 맞닿아있다. 그렇다고 세상과 교유하지 않고 단절할 수는 없는 일. 아예 모른 척하며 살 수는 있지만, 보고도 못 본 척 하며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저 시인의 이름으로 살며, 시를 좇아 무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최준 시인. 그가 오랜만에 시집 ‘칸트의 산책로’(도서출판 황금알)를 냈다. 창작을 쉰 적도, 포기한 적도 없지만 이번 작품들은 문장(文章) 가까이서 천형처럼 옭아맸던 사유(思惟)와 본질에 대한 성찰이 빼곡하다. 최 시인은 ‘말’이고 ‘글’이고 ‘밥’인 시구(詩句)들을 온전한 형태로 독자들에게 헌사한다.

이번 시집은 ‘2020년 충북문화재단 우수창작활동’ 지원을 받아 출간됐다. 코로나19 시대,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에게 치유와 힐링의 시간을 주기 위한 자그마한 결실이다. ‘누구도 정의하지 못한 시간을 여직 버티면서 고단한 삶을 함께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는 시인의 고백은 시집의 출간배경을 응축한다.

칸트의 산책로 -최준

어제를 벗어버린 오늘 나무/어제의 나무가 걷던 길/어제의 나무를 없앤 그 길로 걸어갔던/어디에도 없는 발자국/시간은 굴러 다른 하늘로 가고/허공은 하나가 아니라고/다른 하늘로 떠오른 지붕/오늘 나무는 어제의 나무가 아니라며/갈아 끼운 무릎으로 다시 걸어가는/어제의 길//

나무는 오늘 온종일 어디에 있었나/어제처럼 저녁의 끝에서 다들 되돌아오는데/어제의 나무는 오늘 나무가 아니고/어제는 오늘이 아닌데/노을이 차려놓은 오늘의 밥상을/어제의 숟갈로 떠먹는 오늘 나무//

아, 그런데/나무는 왜 자꾸 두리번거리나/어제의 먹구름은 오늘 겨울/생각 너머로 날아가고 싶은데/마른 눈물은 왜 오늘을 눈 내리는가/눈물을 식탁 위에 자꾸 쌓아놓는가/발목 없는 길 위에서 나무는 어제의 나무와/언제 헤어지려는가/오늘 나무는 어제의 나무가 아닌데/나무는 왜 영원히 나무만을 숨 쉬며 살아야하는가.

최 시인은 ‘어제’와 ‘오늘’을 놓고 집요하게 고민한다. 그것은 ‘시간대’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오늘은 지나갈 어제인데 자꾸 생각 사이에서 서성대는 것이다. 결국 두리번거려도 어제의 나무는 오늘로서 존재하고, 오늘의 나무는 어제의 나무로 생장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무를 기다리고, 나무를 바라보며 시간을 기다린다.

칸트의 산책로 표지.
칸트의 산책로 표지. 황금알

시집의 서평을 쓴 권온 문학평론가는 “최준 시인의 시를 읽으며 독자들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고, 삶의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길 바랐다”며 “최준의 시세계는 손쉽게 요약하기 힘들 만큼 넓고 깊다. 시인의 시편이 보여주는 매력은 일차적으로 안정적인 언어능력, 언어운용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이어 “섬세한 관찰력과 신선한 상상력을 갖춘 그는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파문을 남긴다”면서 “무엇보다도 최준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고, 삶의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고 평했다.

권 평론가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당신과 같은 것들을 믿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진짜 대화가 아니다’를 인용하며 “참된 대화,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영토를 확장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것들을 믿는 사람들과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이뤄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한 길로 나갈 수 있을 테다. 최준의 시를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독자가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연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어떤 시는 짧은 시간에 쓸 때도 있다. 시는 손으로 쓰고 소설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다. 시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영감이라는 것이 가슴속에 들어있어 머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최 시인은 창작을 ‘마치 방학 숙제를 안 하고 있다가 이틀정도 남겨놓고 후다닥 해치운다’고 고백한다. 벼락공부 식으로 써야 스릴이 있고 간절하면 저절로 써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집을 발간하고 쓸 때 커다란 주제를 정해놓고 쓰는 걸 좋아한다. 우연히 한 편씩 생겨난 시들을 모았다가 시집 내는 걸 싫어한다.

한국은 시인이 굉장히 많은 나라다. 5000만 인구 중에 약 2만 명이 시인이다. 그런데 시인들 대부분은 가난하다.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시를 쓰면 가난하다는 게 공식처럼 돼있다. 그래서 시를 쓰고 싶어도 시인의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의 부자다. 마음 안에 이웃과 자연을 녹여놓고 흠모한다. 그래서 번잡한 ‘서울살이’보다 충북을 오가며 ‘타향살이’를 자처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강원도 정선 출생인 최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1990년 문학사상 시(詩) 부문 신인상을 받았으며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됐다. 2000년 시집 ‘개’(세계사)와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지원금 수혜자로 인도네시아에서 5년간 머물다 온 정서와 풍경을 담은 ‘뿔라부안라뚜해안의 고양이’ 시집, 2019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인도네시아 번역시집 ‘야자수 성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모서리가 없다 -최준

나무가 길에 대해 고민할 때/컴퓨터 모니터가 나무를 말하지 않을 때/화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를/나무에게서 찾지만 않는다면, 당신은/행복한 사람//

해와 달에게 목을 매달고/별빛을 이파리에 주워 담으며/나무는 둥글어진다 나날을/둥글어 간다/생각해 보라 당신 주방의 탁자 모서리는/나무가 만든 게 아니다 아시다시피/나무는 둥근 일생/오직 둥글어지기 위해/일생을 고민하는 생//

그러니까 둥글다는 건/모서리가 없는 게 아니다 당신이 둥글다는 건/나이테의 그늘에 앉거나 서서 선선히/세월에 고개 숙이기 시작했다는 것/마침내 모서리 하나/어렵사리 완성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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