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코로나속 설 풍속도 “5인 이상 모이면 모두 작살난다”
[엽편소설]코로나속 설 풍속도 “5인 이상 모이면 모두 작살난다”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1.02.10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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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작가 작품 ‘동호회’
정진영 작가 소설 '다시, 밸런타인데이' 표지

JTBC 금토 드라마 ‘허쉬’로 제작됐던 소설 '침묵주의보'와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를 출간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정진영 작가가 미디어붓 앞으로 엽편소설(葉篇小說:단편소설보다 짧은 소설. 대개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해 그리는데 유머, 풍자, 기지를 담고 있다)을 보내왔다. 작품명은 '동호회'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속에 맞이한 설 풍속도를 그렸다. 정 작가는 오는 4월부터 강원도 횡성 '문학촌'에서 새로운 장편소설을 집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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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코스의 성지라는 시내의 한 파스타 맛집에 남자 넷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주문을 받으러 종업원이 다가왔다. 넷은 서로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며 주문을 망설였다. 보다 못한 대혁이 종업원에게 일행이 있으니 나중에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종업원은 코로나 때문에 5인 이상인 일행은 함께 식당에 입장할 수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혁은 종업원에게 일행이 오면 인원을 나눠 테이블에 앉을 테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혁이 종업원에게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느냐며 목소리를 살짝 높이자 범우가 나서서 제지했다. 종업원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자 범우는 대혁에게 핀잔을 줬다.

“규정 어기면 너만 과태료를 무는 게 아니라 이 집도 작살난다.”

빈정 상한 대혁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병희가 끼어들었다.

“그런 분이 이번 설날 가족 모임을 자기 펜션에서 하라고 회원들에게 광고하셨어요?”

범우는 허허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균이 대혁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수연이 누나를 따로 만나는 이유가 뭐예요?”

휴대폰에서 카톡 수신음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조금 늦어진다는 수연의 메시지였다.

실수인 척 동호회 단체 카톡방에 올린 메시지가 일을 키웠다. 코로나의 확산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혁은 지난 추석에 이어 설에도 가족 모임 없이 홀로 자취방에서 TV 리모컨이나 돌리는 신세가 됐다. 오전 내내 코로나 확진자 발생 소식만 실시간으로 알렸던 휴대폰에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연이었다.

- 혹시 설 연휴에 시간 괜찮으세요? 따로 만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료하게 격리 아닌 격리 상태에 있던 대혁은 뜻밖의 연락에 흥분했다. 수연에게 보낼 메시지를 쓰던 대혁은 동호회 남자 회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멈췄다. 음악을 좋아하는 30대와 40대의 모임인 이 동호회는 남녀 회원 간 사적인 만남을 금지하고, 위반 시 모임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회칙을 뒀다. 회원 간 사적인 만남이 모임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는 게 동호회를 만든 병희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음악이 좋아서 동호회에 참여하는 회원은 드물었다. 모 대기업 계열사 비서실 직원인 수연은 단아한 외모로 남성 회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회칙을 무시하고 수연에게 들이대는 남성 회원들이 많았다. 수연은 그때마다 차분하고 단호하게 단톡방에 신고했고, 병희는 회칙에 따라 그들을 쫓아냈다.

대혁은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치 시행 직전에 열렸던 정기 모임을 회상했다. 한 스터디카페에서 열린 그날 모임에서 대혁은 한국 인디 음악의 역사를 훑으며 음악적 의미를 짚는 강연을 펼쳤다. 그 어느 때보다 반응이 좋았던 모임이었다. 수연은 눈빛을 반짝이며 긴 시간 동안 대혁의 강연에 집중했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고무된 대혁은 뒤풀이 자리가 마련된 노래방에서도 고음 위주의 록발라드를 선곡해 안정감 있게 불렀다. 수연은 대혁의 노래 실력이 정말 좋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혁은 수연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회칙 위반으로 쫓겨난 회원들을 떠올리며 주저했다. 수연이 먼저 보낸 카톡은 대혁에게 들이댈 용기를 줬다. 대혁은 동호회 퇴출을 각오하고 실수인 척 일부러 단톡방에 수연과 만날 시간과 장소를 흘렸다.

-수연 씨. 12일 오후 6시에 시내 중앙로에 있는 ‘띠 볼리오’에서 뵈어요. 파스타 맛집으로 유명해요.

잠재적 경쟁자들을 견제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치기였다. 성급한 행동 같아 잠시 후회했지만, 수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연의 마음도 나와 같은 게 아닐까. 대혁은 코로나가 잦아든 따뜻한 봄에 수연과 함께 벚꽃 길을 걷는 상상을 하자 마음이 설렜다. 약속 장소에 날파리처럼 몰려든 불청객들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연 씨가 내게 먼저 연락한 거야.”

대혁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대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균이 자신의 자동차 스마트키를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닌 거네. 그렇죠?”

아무 사이도 아니다. 대혁은 대균의 지적이 은근히 아팠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대균의 눈빛이 자신만만해 보였다. 범우가 대균의 스마트키를 집어 들어 살피며 피식 웃었다.

“젊고 얼굴 반반한 게 평생 갈 것 같지? 원룸에 월세로 살면서 중고로 뽑은 아우디 이자나 겨우 갚고 사는 놈이 허세는.”

“이 형님 오늘따라 말이 좀 거치시네. 마스크나 똑바로 써요. 입에서 냄새 나니까.”

범우는 스마트키를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으며 손가락으로 병희를 가리켰다.

“회장도 솔직해지셔. 설마 이 자리에 회칙 따지자고 나왔겠어? 제일 음흉한 게 당신이야.”

병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칭 잘나가는 펜션 사업자면 모임에서 돈과 부동산 자랑 좀 그만하고 지갑이라도 한 번 시원하게 여세요. 음악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앞으로 회원을 가려 받든지 해야지 원.”

대균이 스마트키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회장님이라고 불러주니까 자기가 진짜 회장님인 줄 알아요. 그래봐야 월급쟁이인 주제에.”

“우리 회사에 원서도 못 내밀 녀석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급기야 셋은 마스크까지 벗고 가시 돋친 말로 서로를 찔렀다.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수연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연과 눈빛이 마주친 대혁은 셋의 말다툼을 말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셋도 말다툼을 멈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당황한 수연에게 종업원이 다가와 대혁이 앉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일행이냐고 물었다.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5인 이상 집합 금지 규정을 설명하며 곤란해 했다. 네 남자가 서로 자리를 비우라며 눈빛으로 신경전을 벌였다.

“다른 분도 계신 줄 몰랐어요. 회칙은 아는데 중요한 일이어서. 죄송해요.”

수연이 쭈뼛거리며 테이블로 다가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대혁에게 건넸다.

“5인 이상 모일 수 없다니까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갈게요. 실은 제가 5월에 결혼하거든요. 대혁 씨에게 축가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지금까지 가수 빼고 대혁 씨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분을 못 봤거든요. 청첩장을 하나만 챙겨왔는데 어쩌죠?”

테이블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대혁은 무거운 마음으로 청첩장과 수연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수연의 눈이 예뻤다. 대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나중에 따로 밥을 사겠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떠났다. 병희가 대혁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웠다. 남은 셋은 청첩장을 열어 수연의 옆에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얼굴을 붉혔던 범우와 대균이 나란히 병희에게 험한 욕을 쏟아냈다. 대혁은 표정을 가리려고 마스크를 고쳐 쓰며 둘에게 말했다.

“이왕 모였으니 설 분위기나 내게 노래방이나 가죠? 지금 가면 영업시간 전까지는 신나게 놀 수 있겠네.”

 

정진영 작가.
정진영 작가.

☞정진영 작가는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으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침묵주의보',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가 있다.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의 원작이기도 하며,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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