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첫 5000년의 역사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1.03.02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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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고쳐 쓴 경제의 역사
그 역사는 부채로 시작한다

국가 부채뿐만 아니라 개인 부채도 기록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지금의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다. 적어도 부채란 것이 무엇인지, 근본부터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이 확인되는 책이다. 한마디로 말해, 부채는 인간 사회의 발달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지나치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앙이 된다.

학문마다 인간 삶의 다양한 양상을 다루지만, 인류학은 특히 지역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폭넓은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직접 얻은 자료와 다른 인류학 자료들을 바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두루 지적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류 최초의 기록을 남긴 B.C. 3500년경부터 지금까지 경제의 역사를 살핀 책이다. 그 역사는 부채의 역사나 다름없다. 5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놓고 보면, 신용 화폐가 지배하던 시기와 금과 은이 지배하던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확인된다.

부채는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경제의 창조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극단적인 형태로 변하면서 더없이 약탈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자본주의는 시장 원칙을 내세우면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교리처럼 떠받들고 있는데, 저자는 이런 잘못된 원칙을 타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탐욕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에서 채권자를 먼저 보호해서야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할 수 있겠는가?

우리 현대인은 기술 발달의 결과물을 보면서 인간이 놀라운 진보를 이루고 있다고 스스로 감탄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것을 과연 진정한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아해진다. 물론 인터넷 같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혁신도 있지만, 우리가 혁신으로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 금융 분야를 예로 들 경우에 중앙은행과 채권시장, 공매도, 증권거래소, 투기 버블, 증권화, 연금 등이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것들을 운영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인간의 본성은 오히려 그 5,000년 동안에 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성장을 요구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기업가들은 존립을 위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초기에 합리적인 이자가 5%로 받아들여졌듯이, 어느 국가든 GDP가 적어도 5%는 성장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영원한 성장이란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경제학에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도 인류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물물교환이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물물교환에 따른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돈이 발명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저자는 B.C. 600년경에 소아시아의 리디아에서 최초의 주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신용 화폐가 인간들의 상호 작용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유익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예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암시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신용 화폐가 지배하던 시대는 예외 없이 병폐를 예방할 제도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대출자들이 권력자들과 결탁해 서민의 고혈을 짜내지 못하도록 막고, 채무자들을 보호할 제도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 현대인이 살고 있는 새로운 신용 화폐 시대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는 중세 수피교 신비주의자 나스루딘 호자에 얽힌 이야기를 자주 소개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다음 에피소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로 그렇게 단순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스루딘이 지방에서 찻집을 운영하고 있던 어느 날,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왕과 신하들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거길 들렀다. 왕이 “메추라기 알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스루딘이 “조금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메추라기 알 12개로 오믈렛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자, 나스루딘이 서둘러 메추라기 알을 찾으러 나갔다. 왕과 그의 일행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 나스루딘은 그들에게 금화 100냥을 물렸다. 그러자 왕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지방에 메추라기 알이 그렇게나 귀하단 말인가?” 이에 나스루딘은 “이 지방에 귀한 것은 메추라기 알이 아니오라 왕의 방문이옵니다”고 대답했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라면, 나스루딘의 이런 태도가 정상인가, 아니면 신용 등급이 낮은 가난한 사람들이 최고의 이자율을 감당해야 하는 현재의 체제가 정상인가? 시장을 신으로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후자가 정상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 인간 공동체의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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