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에는 이제 먼지 쌓인 이야기만 허공을 떠돌고.
빨간 우체통에는 이제 먼지 쌓인 이야기만 허공을 떠돌고.
  • 최진섭 기자
  • 승인 2018.12.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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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잊혀져가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하고, 지난 한주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수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더군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로 마을 어귀에 장승처럼 서서 동네 사람들의 한숨과 환호를 모두 지켜보던 빨간 우체통에 대한 추억을 소환해 보려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마을 소식을 전하는 든든한 전령사로 남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빨간 우체통이 박물관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어 가고 있으니, 이 아쉬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마을 어귀, 늘 그 자리에 있던 빨간 우체통. 사진=미디어붓DB
마을 어귀, 늘 그 자리에 있던 빨간 우체통. 사진=미디어붓DB

10년 전쯤인가, 우연히 전국의 우체통 현황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체통이 가장 많았던 때가 90년대 초반이었고, 전국에 6만여개가 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년 2000여개의 우체통이 철거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가 10년 전이니 2008년쯤이었을까요? 그때도 절반 가량인 3만여개의 우체통이 철거됐다고 했으니, 지금은 아마도 훨씬 적은 수의 우체통만이 남아 있겠죠.

저는 우체통하면 두 가지 추억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국군 장병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날이라며, 학생들에게 편지지를 한 장씩 나눠 주셨습니다. 편지 봉투는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 ‘○○ 초등학교 4학년 ○반 ○○○ 입니다’를 크게 쓰신 뒤, “자! 여러분 처음 시작은 이렇게 쓰고, 다음 줄부터는 여러분이 쓰고 싶은 말을 쓰면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편지를 다 쓴 후 반장이 학생들의 편지를 모두 걷어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나름 정성껏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낙엽인지, 눈인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인가 ‘밟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받침을 ‘ㄹㅂ’이 아닌 ‘ㄹㄱ’으로 쓴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편지를 확인하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갔지만 이미 편지는 선생님의 손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순간, 요즘 말로 ‘멘붕’이 오고 말았습니다. 제 편지를 받은 군인 아저씨가 “이놈은 이거, 4학년씩이나 돼서 맞춤법도 모르는구먼”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하느라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저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오늘 위문편지 쓴 곳 주소 좀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이유는 묻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소를 받아 든 저는 집에 오자마자 편지를 썼고, 누군가에게 들키면 창피할까봐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가 마을 앞에 있는 우체통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빨간 우체통 입구에 집어넣었습니다.

- 아까 편지를 보낸 ○○○입니다. ‘밟으며’를 ‘밝으며’ 로 잘 못 썼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원래 알고 있는데 실수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문장이 생각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간단한 편지였습니다. 저는 우체통 바닥에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끝낸 것처럼 우체통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그날 우체통은 제 키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우체통이 저보다 점점 작아져 제가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을 때까지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나 혼자 웃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매일 만나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우체통과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지금은 동네 어귀의 빨간 우체통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때 그 시절 조금은 웃펐던 많은 사연들은 아직도 기억 저편에 남아 가끔 웃음 짓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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