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다시 시작되다
첫사랑이 다시 시작되다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8.11.2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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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르바이트(알바)를 두 탕 뛴다. 하나는 수학 과외이고, 다른 하나는 라멘집이다. 생애 '첫 알바’다. 제대하자마자 복학비용을 보태고 싶다며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느 날, 알바 현장(라멘집)을 암행했다. 몰래 지켜보니 설거지와 서빙, 청소, 카운터 일을 하느라 곁눈질 할 틈조차 없어 보였다. 커오면서 그릇 닦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날 밤, 아들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둘은 아무 말도 섞지 않았다. 조용히 술상에 마주앉았다. 학창시절 돈가스 집에서 박박 기던 내 청춘과 오버랩 됐다. 술은 목구멍의 삼투압을 견디지 못하고 산화했다. 아들의 ‘첫 알바’는 가족을 위무하는 아름다운 출행이었다.

▶청춘의 시간이 단서 없이 지나고 있을 때 수국, 해국, 과꽃, 채송화가 앞 다퉈 피고 졌다. 그리고 여름이 떠나갈 즈음, 봉숭아가 피었다. 봉숭아는 붉은 그리움이었다. 쥐어짜낸 그 새빨간 꽃물이 손톱 위에 놓이면 사춘기가 곱게 물들었다. 그리고 사랑의 열병이 식어갈 즈음 연분홍 자태를 속곳에 감추고 사라졌다. 첫사랑 같았다. 자국은 남되 멍은 들지 않는 막연한 그리움. 지우개가 스스로의 살을 깎아 고뇌를 지우듯, 사랑은 서툴지만 사람을 단련시켰다. 첫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옛 기억을 소환하는 각인 같은 것이다. 마치 걷어차일까 봐 먼저 걷어차는, 그래서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떠날 명분을 준다. 찬연한 별리다.

▶‘처음’이라는 설렘은 ‘끝’이 주는 아쉬움과 배치된다. 하얀 백지에 핏물 하나 떨구는 맹서이자 징표다. 필시 시작에는 끝이 있지만 시작은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시작은 순결하고 숭고하다. 첫사랑, 첫 꿈, 첫 키스, 첫날밤, 첫눈, 첫무대, 첫걸음 등등. ‘첫’이 들어가는 말처럼 가벼운 듯 벅찬 단어도 없다. ‘첫’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증거가 된다. 쓸모와 쓸모없음을 가릴 필요 없이 그 순간부터가 역사다.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은 대게 누군가 보기에 ‘쓸모 있는’ 일들이다. 그래서 초심이 중요하다. 처음 먹었던 맘을 원형대로 유지하려면 정의로워야 한다. 사슴을 말이라고 속일 수 있어도 사슴은 그저 사슴일 뿐이다, 집안에 훔친 물건 몇 개 던져놓으면 아무나 도둑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비겁하다.

▶‘붓’은 부드럽지만 붓끝은 벼리다. 휘어 감는 곡선의 유려함 뒤에는 먹물의 뜨거움이 있다. 그래서 붓을 정염의 칼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붓을 꺾을 수 없는 것은 붓의 휘어짐에 있지 않고 절연(截然)의 긴장감에 있다. 처음 붓(pen)을 잡고 세상과 만나던 날, 갈피를 못 잡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건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쓰고 싶었는데 붓끝은 자꾸 분절했다. 사람이, 사람의 얘기를 정직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자칫 붓끝이 흐려진다면 한사람의 생애가 부서질 수도 있다. 글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글은 써먹지 못한다는 ‘그것’을 써먹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쓰는 기쁨보다 읽히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읽히지 않는 글은 통증일 뿐이다. 생애의 울퉁불퉁한 돌출을 꼬집어 뜯으며 다시 붓을 잡는다. 그 붓끝은 약자의 편에서 강자를 겨누고 있다.

나재필 기자 jpna22@mediabo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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