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충돌과 이해타산
이해충돌과 이해타산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1.05.04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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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필의 문방사우]
기사와 관련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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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리(교량)가 무너져도, 항공기가 추락해도, 건물이 무너져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불운이 생겨도 ‘나’는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아, 멀쩡했던 다리가 자신이 지나갈 때 무너질 리 없잖은가. 아, 평온했던 비행기가 자신이 탔을 때 떨어질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무조건 ‘나’는 안전하고 ‘나’는 위험하지 않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덜컹거리고,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깨닫는다. ‘아! 나에게도 불행은 찾아오는구나. 그 불운이 내 것이었고 그 불행 또한 내 것이었다’고 통탄한다. 내 의식과 내 의식이 서로 이해충돌하면서 제3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예전에 다니던 신문사 사무실 컴퓨터가 랜섬웨어(ransom ware)에 당한 적이 있다. 랜섬웨어는 ransom(몸값)과 ware(제품)의 합성어로 컴퓨터 사용자의 문서를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랜섬웨어는 사상 최악의 악성코드다. 이때 10년 간 축적해온 각종 문서들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무리 복구 툴을 찾아봐도 살릴 수 없었다.

잃어버린 문서들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독일 엘베강, 이탈리아 밀라노, 체코 프라하,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 특급열차,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여행 스케줄을 포기하면서까지 만들던 것들이었다. 그깟 문서 1만5000개가 대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악성바이러스는 두려움이다. 또 다시 문서를 만들어야한다는 중압감이 아니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당혹감, 그리고 누군가의 해킹으로 인해 ‘버려졌다’는 상실감이 컸다.

최근 스마트폰에 저장돼있는 전화번호들을 정리하면서 많은 지인들과의 추억과 기억을 지웠다. 버렸다는 표현이 경박할지 몰라도 번호를 버린 것은 맞다. 둘러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잊히고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별 효용가치도 없거니와 하등의 교유도 없는 번호들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많은 무명씨들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다. ‘수신차단’ 또 ‘수신차단’을 걸었다. 개중에는 진짜 핏줄처럼 끈끈했던 이도 여럿 있다.

그들은 더치페이(Dutch pay.각자 내기)가 아닌 ‘네 돈 먹기’에 능수능란한 작자들로 보였다. 어쩌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야말로 그들만의 룰처럼 여겨졌다. 얻어먹는 놈은 계속 얻어먹으려고만 하고, 사는 놈은 죽어라고 사야한다. 더구나 ‘안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못 내겠다’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이건 이해충돌이 아니라 의견충돌일 수도 있다. 아무리 ‘김영란’을 외쳐도 지하경제는 신나게 돌아가니까.

국회의원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직무 관련 정보로 사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해충돌 방지 법안’이 8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자는 모든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 국·공립학교 교직원 등 약 200만 명에 이르고 가족까지 합치면 700만~800만 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 평가에서 180개국 중 33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패수준이 높은 우리나라가 ‘이해충돌방지법’ 하나로 아주 청렴해질 리는 없다. 다만 국회의원이나 공직자들이 앞으로 그냥 ‘말아 드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바둑에는 사석(捨石) 작전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효용가치가 적거나 아예 없을 돌(廢石)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거나 다른 실리를 챙기는 전략이다. 바둑의 고수들은 어떤 돌이 앞으로 더 큰 가치를 가질 것이고, 어떤 돌이 가치가 없을 것인가를 정확히 판단한다. 이와 달리 하수들은 버려야 할 돌(廢石)과 향후 중요한 역할을 할 돌(要石)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미래가치가 없는 몇 개의 돌을 아까워하다 종국에는 대마(大馬)를 죽이고 판을 그르쳐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게 바로 하수들이다.

잘 나이 드는 비결 중 하나가 ‘단념’이라고 한다. 이건 포기가 아니다. 단념은 포기한 다음에도 머릿속에 남는 미련이나 집착 같은 것까지 비워버리는 결심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 누리고 있던 것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이해충돌’이 있다면, 그리고 향후 ‘이해충돌’ 가능성이 있다면 과감하게 돌(捨石)을 던져야한다. 버려지기 전에 버리는 것도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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