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라(全羅)의 땅은 발효와 숙성을 거친 삶의 발원지
9. 전라(全羅)의 땅은 발효와 숙성을 거친 삶의 발원지
  • 미디어붓
  • 승인 2019.06.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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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 전경. 미디어붓
전남 구례 전경. 미디어붓

충청과 전라를 가르는 금강하굿둑은 마을의 경계이자 도계다. 장항에서 군산으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전라의 땅이다. 도계(道界)가 의미하는 건 마음의 경계가 아니다. 정경(情景)의 구획이다. 바람이 다르고 산세가 다르고 말투가 다르다.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성정 또한 다르다. 이는 대대손손 자연스럽게 내려온 전승의 가치다.

전북 장수군 서사면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금강(錦江)은 충북 남서부를 거쳐 충남·전북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群山灣)으로 흘러든다. 총길이가 400여㎞에 달하는데 옥천 동쪽에서 보청천(報靑川), 조치원 남부에서 미호천(美湖川), 그리고 초강(草江)과 갑천(甲川) 등 크고 작은 20개의 지류가 합류한다. 이 물들은 감입곡류하면서 무주구천동, 양산팔경(陽山八景), 백마강, 낙화암을 만들며 1500년 전 백제를 깨운다.

호남의 등고선은 서쪽으로 기운다. 남쪽에 이를수록 허리춤이 높다. 한없이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이 비탈의 산세를 만들었다. 무등산과 월출산 그리고 지리산을 품었으니 애움길(굽은 길)이 많고 구릉도 낮지 않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그 등고선은 매우 가파르다. 바다의 낮음과 산의 높음이 만나 기세가 등등하다.

강(江)의 발원지가 전북에서 시작되고 그 끝에 평야가 맞닿아 있는 건 천혜의 땅임을 말해준다. 섬진강 발원지 전북 진안의 데미샘, 금강 발원지인 전북 장수의 뜬봉샘은 마을과 마을을 휘돌아가며 곡창의 젖줄이 되고 있다. 왜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을 했는지 이 땅은 말해준다. 큰 산은 단지 명맥일 뿐 끝없는 평야가 이어진다. 일단 시야가 넉넉하다. 예부터 이들은 곡창지대의 기름진 재료(物性·물성)들을 가지고 여타 지역에서 먹어보지 못할 진미를 만들어왔다. 전라 요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발효(醱酵)다. 음식이란 자고로 날것-익힘-발효라는 순서로 발달한다. 특히 이들의 양념은 단지 몇 시간이 아닌 1년 이상의 숙성을 통해 완성되는 슬로푸드다. 항아리 속에서, 처마 밑에서, 온돌방 안에서, 심지어 그늘진 동굴 안에서 기나긴 인내와 인고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가변성과 불완전성을 극복하니 대담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이다. 때문에 어느 음식 하나 허투루 나오는 법이 없고, 어느 재료 하나도 대강 만들지 않는다. 비록 가난했을지언정 끼니만큼은 스스로 대접받길 원했던 이들의 맛있는 유산이다.

전라의 땅은 신라 하대인 892년(진성여왕)부터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36년간 왕도(전주)의 품위를 지켰다. ‘왕조마을’ 익산을 지나 김제를 타고 내려오다 서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 부안군이 나온다. 부안은 이름 작명소 같은 느낌을 줄 만큼 독특한 지명들이 많다. 에로틱한 통정리, 사창리가 있고 당하리, 노동리, 장서리, 가오리, 우산리, 냉정리, 고부리, 수락리, 용서리 같은 코믹지명도 많다. 아예 심플하게 저기, 평지라는 이름도 있다. 이름이 주는 무한한 평화는 마치 샛길로 접어드는 느낌을 준다. 샛길은 우정과 대화 그리고 끊임없는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거기엔 경쟁과 무시, 이탈, 반목이 없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안에서 밖으로, 낯선 곳에서 친숙한 곳으로 지나는 듯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인 길보다는 샛길, 확장된 비인간적 길보다는 오솔길, 어떤 기능성도 인정되지 않는 길을 가고 싶어 한다.

정읍과 고창, 장성, 순창, 담양, 나주, 영암, 강진, 화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산은 높아지고 바다는 그 뼘이 커진다. 유배의 땅은 은일(隱逸)과 풍류를 낳는다.

전남 보성은 예각(銳角)을 지향한다. 0°보다 크고 직각(90°)보다는 작지만 모든 언덕은 아찔하다. 그 아슬아슬한 비탈길에서 차(茶)밭은 농군의 땀으로 영근다. 러시아의 다차(Дача) 같은 느낌이다. 그들은 통나무집과 텃밭이 딸린 주말 농장에서 쉼을 찾는다. 일하면서 쉬고, 쉬면서 일하는 한가로운 여가를 키운다. 이곳에도 별난 지명들이 많다. 예를 들어 만수리, 호동리, 고장리, 축내리, 노산리 등이다. 마을은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표정으로 알리고 풍경은 길의 지루함을 감춰준다. 바람도 쉬어 갈만한 노송의 그림자는 너른 들녘의 고즈넉한 정경을 에두른다. 바람은 서쪽 끝에서 걸려 동쪽과 북쪽을 휘돈다. 여러 채의 민가는 올망졸망하다. 집 사이에 턱이 없어 정겹다. 마을은 전혀 시골스럽지 않다. 쓰러져가는 집도 없다. 마을은 사람의 땅인 동시에 자연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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