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을을 닮은 주민, 주민을 닮은 마을들
14. 마을을 닮은 주민, 주민을 닮은 마을들
  • 미디어붓
  • 승인 2019.07.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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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다압리. 미디어붓
광양 다압리. 미디어붓

지명은 시간의 지문(指紋)이다. 억겁의 세월이 두두물물(頭頭物物) 살갗에 닿고 문명의 흔적으로 남았다. 그래서 지명은 문화유산이다.

마을이름은 마을을 닮았고, 마을은 주민들을 닮았으며, 집들은 주인을 닮았다. 물과 산의 정기가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의 유전자(DNA) 속에 동질의 단서, 동질의 식별 문장(紋章)을 오롯이 담았다. 그 이름이 다소 경박하거나, 우울하거나, 헤프거나, 우악스러워도 마을은 사람을 닮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마을을 닮아가고 있다.

마을에도 얼굴이 있다.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체취가 있다. 무릇 마을 생김새란, 마을 주민들의 표정과 삶이 녹아있다. 심지어 사투리와 억양조차도 담는다. 그래서 지명(地名)엔 그들만의 역사성과 정통성, 정체성이 깃들어 대대로 답습, 전승된다. 기본적으로 작명은 마을의 생활방식, 지형, 물, 풍속, 인물, 정자, 역, 관청, 고개 등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지명은 이해당사자 간의 공공성, 행정적인 근거 때문에 함부로 정할 수 없다. 사람의 개명처럼 마을 지명을 개명하는 일도 어렵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혼(魂)이 담겨 있다. 그 혼을 학문적으로, 관행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땅은 땅의 이름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래서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존재성을 꿰뚫어야한다. 마을의 역사, 건축양식, 주민들의 기질이나 말투, 옷, 음식(요리)의 정념이 살아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 새로운 자연과 문화, 인간상을 천착해가는 과정은 하나의 위대한 기록이다.

문제는 투박하지만 정겹고, 순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들이 행정편의를 위해 한자로 기록되면서 변질된다는 점이다. 딱딱하고 건조한 이름으로 바뀌거나 엉뚱한 지명으로 바뀐 곳이 적지 않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기를 누르기 위한 일본의 야만성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도 적용돼 본뜻과 달라진 지명이 많다. 해괴하고도 망측한, 때론 입에 담기 민망한 지명들은 대개 그런 연유로 바뀐 것이다.

충청도 어느 땅에는 ‘고자리’가 있고 경기도 어느 마을에는 ‘유방동’과 ‘발랑리’가 마을의 푯말로 남아 있다. 이브의 ‘샅’을 연상시키는 벌리동·지보리가 있는가 하면 남근(男根)을 상기시키는 성기리·물건리, ‘흘레’를 떠올리게 하는 발포리·신음리·교성리·사정리·박암리도 존재한다. 까발려있는, 완전히 노출된 듯 아찔하다. 사랑을 하면 그 갈망에 죽고 마는 ‘아스라’와 같은 이름들이다.

‘엽기의 동네’도 있는데 실은 엽기적이지 않다. 조폭들의 ‘연장’과 말투를 연상시키지만 인심과 풍수가 더없이 좋은 그런 동네다. 망치리, 갈구리, 다죽리, 압사리, 욕지면, 구라리, 객기리, 경악리, 괴소리, 대가리, 원수리, 조전리, 골지리, 마지리, 부수리, 공포리, 객사리, 고문리 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조용한 잔혹’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이름들은 마치 세상의 흐름 밖에 있는 듯하다. 독설 같지만 파격이다. 비주류 같은 주류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해학의 지명’에는 각서리(각설이), 고사리, 파서리가 있다. 목도리와 장갑리, 고와리, 차사리, 수다리, 고도리, 후지리, 무수리, 방기리, 오목리, 원통리, 유치리, 염치읍, 요강리, 주정리, 계란리, 연탄리 등의 지명은 이름만 들어도 미소가 돈다. 지독한 현실감, 너무 현실적이어서 익살을 넘어 유쾌하다. 택시를 잡기 어려울 때 곱절로 주겠다고 ‘따블’을 외치는 서울엔 진짜 ‘따불’이라는 동네도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던 마을인데, 달랑지 마을이 두 개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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