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정자’는 수컷 정자가 아닌 느티나무
17. ‘정자’는 수컷 정자가 아닌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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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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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정자리.
서산 정자리.

정자리(충남 서산시 고북면)

서해안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서산 고북면은 종(縱)축으로 15번 국도와 29번 국도 사이, 해미면과 갈산면 사이에 있다. 왼쪽 멀리에 A지구 방조제가 마을과 사람을 잇는다. 이 땅은 물과 땅을 이마에 대고 서로 윤회(輪廻)한다. 너른 평야와 낮은 구릉이 살갑게 마주하니 도탑다. 바이크 라이딩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다. 여기서 포인트는 ‘길’이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순간적으로 향방을 정해야한다. 4차선을 달리다가 2차선으로 접어들면, 대부분의 길은 좁아진다. 깔때기 같다. ‘정자리’도 마찬가지여서 2차선에서 비켜나오자 긴 농로가 이어진다. 진초록 나무들과 진갈색 들녘이 그 색을 합쳐 풍요로움을 더한다. 길은 꾸불꾸불 이어진 진창길로 들썩이고, 이내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호젓한 들길로 직립한다. 사람이 고의로 만든 물리적인 길이 아니다. 그래서 속도감은 없으나 길 위의 삶이 왜 행복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정자리’라는 지명은 매우 직선적이다. ‘정자’는 경치 좋은 곳에 지은 집(亭子) 또는 수컷의 생식세포(精子)를 말하는데, 이 동네이름을 떠올리면 후자 쪽에 더 치우친다. 마을 이름이 흥미로운 건 지명 속에 그 지역의 역사와 생활·문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이름도 한자(漢字)로 풀이하지 않으면 생판 다른 지명으로 읽히기도 한다. ‘정자리’ 또한 본말이 전도된 경우다.

서산시 고북면 정자리는 마을 한가운데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정자리(亭子里)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정자1리에는 하촌·윗말·해미령·서낭댕이·음지말·신투리지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정자2리에는 양거미·윗말·아랫말·초막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그중 양거미는 양귀비보다 예쁜 처자가 많다 하여 생긴 이름이며, 초막골은 피난민들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정자리는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실제 주인공인 엄기봉 씨의 고향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보통 정자나무는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해 사람들의 온전한 쉼터다. 딱히 모이라고 하지 않아도 큰 나무 밑은 싱싱한 그늘막이어서 연배를 떠난 놀이터가 된다. 그래서인지 그늘나무란 별칭도 있다. 보리마당질 뒤에 막걸리 잔이 오가는 장소요, 심심풀이 골패를 가지고 놀던 유희의 처소이기도 하다. 마을마다 200~500년 된 정자나무 한두 그루 없는 곳이 없다. 이 나무는 동구 밖 수호신이다. 바람을 만들고, 바람을 껴안고, 바람을 키운다.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생몰(生沒)의 연대를 함께 한다. 동네사람들의 나이처럼 나무 둥치 또한 굵어지면서 나이테를 늘린다. 서로의 ‘늙어감’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추하지 않다. 되레 거룩한 일대기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나무 밑에서 생장했듯, 나무도 제 몸으로 옹이를 비켜서며 가지를 키운다. 질긴 여름의 모진 삼투압은 벅차오르는 수액으로 남아 사계절을 지탱한다. 잎은 떨어져 자신의 양분이 되고 다시 관목의 팔뚝을 불린다. 마을 입구의 나무는 역사다.

“치마를 벗어라.”

이몽룡이 사양(斜陽:석양)을 받으면서 삼각산 제일봉에 봉학(鳳鶴)이 앉아 춤추는 듯 있다. 두 활개를 살포시 들고 춘향의 섬섬옥수를 반듯이 겹쳐 잡고, 옷을 벗긴다. 그리고 가는 허리를 안는다. 이번엔 속속곳(치마 안 속옷)을 벗기려고 하자 춘향은 녹수(綠水)의 홍련화(紅蓮花)가 미풍을 만나 흔들리는 듯 부끄러워 배배 꼰다. 옷끈 끌러 발가락에 딱 걸고서 끼어 안고, 지그시 누르며 기지개 쓰니 발길 아래 떨어진다. 옷이 활딱 벗어지니 형산(荊山)의 백옥(白玉)덩이가 이에 비길쏘냐. 〈…중략…〉 골즙(骨汁)을 낼 때에 삼승 이불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맞추어 쟁그랑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 등잔불은 가물가물, 맛이 있게 잘 자고 났구나…. 하루 이틀 지나가니 어린 것들이라 신맛이 간간 새로워 부끄러움은 차차 떨어지고 이제는 희롱도 하고, 우스운 말도 있어 자연히 사랑가가 되었구나.

얼핏 보면 음탕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춘향전> ‘사랑가’ 원전의 일부를 풀어서 옮겨놓은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은 아름다운 고전(古傳)이지만 내밀하게 돌고 돌았던 판본에는 이몽룡의 ‘색정증(色情症)’과 성춘향의 ‘시치미’가 적나라하다. 이 도령의 ‘거시기’를 늙은 중이 송이 죽을 자시다가 혀를 데인 형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본 성춘향이 ‘송이버섯의 머리’에 대해 질문하는 대목은 야릇하다 못해 질척인다.

음담패설을 음탕함 자체로만 해석할지, 아니면 해학이나 골계미로 볼지는 관념의 차이다. 말은 정제됨을 스스로 강요한다. 뜻이 속되더라도 말은 입(口)의 장치를 통해 재구성된다. 점잖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음담(淫談)은 알고 있지만, 패설(悖說)하지 않는다. 그런데 패설하지 않는다고 음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정(雅正:아담하고 바름)은 작의적인 제스처다. ‘나는 바르니 당신도 바르게 행동하라’는 묵언일 뿐이다.

술자리에서 떠드는 음란하고 방탕한 외설설화(猥褻說話)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동석자가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건 우스갯소리나 유머가 아니라 성희롱이다. 진한 농(弄)과 성희롱의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음담패설은, 그래서 ‘적당히’라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네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완곡한 경고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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