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여행이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일
30. 여행이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일
  • 미디어붓
  • 승인 2019.10.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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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딩하는 모습.
전라도 시골길을 라이딩하는 모습.

은퇴한 저널리스트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999년 5월 장장 4년에 걸친 도보여행에 뛰어든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단까지 1만 2000㎞의 실크로드를 횡단한다. 베르나르는 아내와 사별해 홀로 남은 노인이다. 그는 삶을 계속 이어갈 욕망을 잃고 존재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걷기는 세상과 타협할 명분이었다. 그는 석 달에서 넉 달씩 세 단계에 걸쳐 매번 2500㎞에서 3000㎞ 정도씩 나누어 걸었다. 그는 말했다. “나에게 힘든 일은 걷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일이다. 나는 걷고 또 걷는 꿈을 꾼다.”

인권운동가 벤저민 메이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인생의 비극은 주로 실패가 아닌 현실 안주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너무 적은 일을 하는 것에서, 능력 이상으로 사는 것이 아닌 능력이하로 사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행은 필연이다.”

홀로 여행하는 것은 대체로 오르막이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 그만큼의 에너지, 수고가 필요하다. 더구나 적대적이거나 불운한 정령이 깃든 곳을 가게 됐을 땐 더욱 힘들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이유들로 당혹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자신의 세계를 닫아걸고 칩거할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 여행은 동반자가 중요하다. 누구와 떠나느냐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특히 장기 레이스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어느 유명 산악인들이 남극에서 극한의 상황을 맞게 됐을 때, 얼굴을 마주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퍼부어대며 싸웠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둘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악다구니를 퍼부을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욕 배틀(battle)을 한 것은 그만큼 지쳤다는 뜻이다.

애인, 부부, 친구끼리의 여행은 흔하다. 이 여행자 구조는 익명성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여행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의 밑천이 드러나게 돼있다. 착한 심성은 여행에서 단순한 배려일 뿐이다. 오랜 시간 동행하려면 고도의 숙련된 혜안이 필요하다. 그만큼 여행은 배려와 배려가 뒤섞여 감정의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고난도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형제는 혈맹이거나 혹은 길드(Guild)다. 일종의 커뮤니티 시스템을 갖춘 동업자인 셈이다. 피붙이는 친해 보이나 친하지 않은, 어쩌면 친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지나치게 배려하는 조심성(操心性)’이 그러하다. 일부러 침묵하고 일부러 모른 체하는 역설적인 회피는 은원(恩怨)의 경계를 비켜간다. 성장기에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처마 밑에서 살았던 과거는 현재의 거울일 뿐이다.

형제가 생전 처음,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함께 여행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린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다툴 일이 없었다. 다투기 전에 이미 싸울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간파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내 평화로웠다. 왜 떠나야만 했는지 둘의 명분이 같았으므로 서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은 흔적만 남을 뿐,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기억은 소멸되고 추억만 덩그러니 잔존한다. 추억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고, 기억은 홀로 조용히 저장(간직)하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일이다. 어디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사실, 여행은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여행 공포증이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여행하는 것을 죽음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이따금 기차를 놓칠까봐 두 시간 일찍 역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나 막상 기차가 나타나면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둠에 휩싸인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무시로 들었다. 떠나올 때는 질풍 같았지만, 낡은 방랑벽은 시시때때로 포기를 강요했다. 청년과 중년의 고뇌가 없었다면 고요와 정적, 은둔을 걷어차 버렸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고독과의 싸움이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 직면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부정적 감정(투쟁-도피모드)에 빠지기 쉽다. 짜증이 나고 마음이 급해지거나 불안과 염려가 엄습한다. 투쟁-도피상태에서는 깊고 명료하고 논리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같은 곳을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이다. 틀림이 아닌 다름, 다름이 아닌 같음, 그런 감정들이 여행을 착하게 만든다. 마치 오르막과 내리막처럼 여행과 동행은 안주(安住·편안함)와의 싸움이다. 오르막은 에너지, 결심, 수고가 필요하지만 내리막은 그냥 내버려둬도 내려온다. 한마디로 ‘선택’이다.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프라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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