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리(충북 음성군 음성읍)
오토바이 라이딩의 매력은 ‘길’ 찾기다. ‘길’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그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다. 그 긴 여정이 끝나면 ‘길’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생긴다. 길은 허름한 여백의 시간, 잠시 쉼표를 찍게 하는 삶의 휴지기 끝에 매달리는 습성이 있다. 제 스스로 바위를 깨고, 산을 옮기고, 써레질을 한 것이 아니다. 세월의 축적이다. 길의 겉모습은 세상을 구성하는 무수한 퇴적층을 감추고 있는 초입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목적지는 다시 길을 떠나기에 적당할 뿐, 모든 길은 돌아가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더러는 나무와 숲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길이 있고,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힘든 좁고 가파른 길이 있다. 소멸과 탄생, 삶과 죽음이 명멸하는 새 길과 옛길 또한 있다. 옛길, 그것은 단순한 직선이 아닌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는 곡진한 길이다. 길은 과거였고 현재이고 오래된 미래다. 그래서 여행자는 여행지보다 먼저 도착하는 법이 없다. 늘 지나갈 뿐이다. 여행지 목표는 시간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射精·事情·査正·司正·査定·使丁·舍亭·射亭·射程·寫情·辭呈·巳正·四正·沙汀·邪正·私情…. 16개 모두가 ‘사정’이라는 한자다. 물론 글자가 다르니 뜻도 다르다. 한글세대에겐 그 글자가 그 글자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모든 뜻을 알 수도 없다. 언제 어떻게 쓰이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를 쓰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 표의문자인 한자를 활용한다. 국한문혼용은 2000년대 들어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한자 병기(한글 옆에 괄호를 쳐서 그 안에 한자를 표기)는 사용하고 있다.
사정의 사전적 의미는 무수히 많다. 사정(司正)은 그릇된 일을 다스려 바로잡는 것을 뜻하고, 사정(沙汀·砂汀)은 바닷가 모래톱을 말한다. 사정(邪正)은 그릇됨과 올바름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며, 사정(私情)은 개인의 사사로운 정을 지칭한다. 또한 사정(使丁)은 과거 관청이나 기관에서 잔심부름하던 남자 하인을 칭하며, 사정(舍亭)은 정자(亭子)를, 사정(査正)은 조사해서 그릇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정(事情)은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말하고 무엇을 간청한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사정리라는 지명이 눈길을 끄는 것은 남성의 생식기에서 정액을 내쏘는 것을 일컫는 사정(射精)을 떠올리기 때문이리라.
전남 고흥 팔영산 자락에 있는 사정리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충북 청주시 옥산면과 옥천군 군서면, 충남 논산시 벌곡면, 경기 포천시 관인면,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경남 함안군 법수면과 산청군 신등면, 해남군 계곡면, 대전 중구, 전북 군산, 경북 경주, 경산에도 사정동이 있다. 모래우물이 있어 모래물, 사정(沙丁, 沙井)이라고 일컫는 곳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도 있다. ‘그곳에 가면 사정없이 사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딱한 사정이 있어도 안 봐준다.’ 주민들이 알면 경(黥)칠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