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길에는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40. 길에는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미디어붓
  • 승인 2020.01.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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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가는 길.
동해 가는 길.

‘사내 걸음’으로 치면 한 시간에 4㎞ 정도를 간다. 지구의 둘레가 4만 74㎞라는 점에서 지구 한 바퀴를 돌기 위해서는 1만일(27.4년)이 걸린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시속 50∼60㎞로 달릴 수 있으니 이보다 훨씬 적은 시간 내에 더 먼 길을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속도와 거리는 여행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먼 거리를 조금 빠르게 가면 더 많은 풍경들을 경험할 수 있어서다. 길 위에서 알지 못할 방향 때문에 시간을 쓰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은 없다. 길 위에 시간이 펼쳐지고, 시간 속으로 길들이 이어진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길은 산을 피하면서 결국은 산으로 달려든다. 길들은 산허리의 가장 착하고 완만한 자리들을 골라서 이리저리 굽이친다. 이 길들은 어떠한 산봉우리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어떠한 바다도 새롭게 길을 내지 않는다. 고갯마루에 이르러서야 지나왔던 길, 지나왔던 바다의 높이를 눈 아래 둘 뿐이다.

보은군 쪽에서 속리산으로 가는 방향에 말티재가 있다. 지금은 37번 국도인 속리터널과 당진-영덕고속도로 청원JCT-낙동JCT 구간이 개통돼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익사이팅한 여행자라면 이곳을 선호한다. 법주사 쪽에서 올라갈 때는 완만하지만, 반대로 내려갈 때는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말티재는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갈 때 처음 닦은 길이고,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연에서 말로 갈아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보통의 라이더들은 되도록 평지를 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수많은 고개들을 우회하고 회피하기엔 그 수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여정 앞에 닥친 고개들을 숙명처럼 넘는다. 그런데 의외로 내리막과 오르막이 교차하는 꼬부랑길에 묘미가 있다. 평지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달리는 (그야말로) 질주이지만, 구불텅한 길은 속도와 균형을 적절히 배합해야만 하는 고난도 라이딩이기 때문이다.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 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 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임영조의 시 ‘12월’이다. 막다른 골목, 창백한 얼굴, 뼈 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단역, 얼룩과 애증, 여백과 마침표…. 시구(詩句)에서 쓸쓸히 세상과 마주한 조연은 누구이기에는 이렇듯 사무치는 것일까. 평범하고 성실한 소시민일 수도 있고, 못다 이룬 꿈이 한이 되어 증오밖에 남지 않은 슬픈 사내일 수도 있다. 다만 수컷의 본능을 상실한 동시에 수컷으로서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키려는 결의는 먹먹하기까지 하다. 남자라는 이유, 가장(家長)이라는 이유로 기댈 수도 없고, 기대서도 안 되고, 기댈 변명조차 찾지 못하는 이 시대 사내들의 울분쯤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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