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비박은 이슬을 맞고, 숙박은 이슬을 피하는 것
57. 비박은 이슬을 맞고, 숙박은 이슬을 피하는 것
  • 미디어붓
  • 승인 2020.05.0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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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장시간 여행 중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게 아니다. 자는 게 가장 큰 숙제다.  노숙(露宿), 야숙(野宿)의 원형질인 집(텐트·노숙)은 곧 어둠이다.
장거리, 장시간 여행 중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게 아니다. 자는 게 가장 큰 숙제다. 노숙(露宿), 야숙(野宿)의 원형질인 집(텐트·노숙)은 곧 어둠이다.

장거리, 장시간 여행 중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게 아니다. 자는 게 가장 큰 숙제다. 비바람 걱정 없이 숙박을 하거나 캠핑카로 다니는 게 아니라면 비박(bivouac·한뎃잠·한둔) 밖에는 길이 없다. 노숙(露宿), 야숙(野宿)의 원형질인 집(텐트·노숙)은 곧 어둠이다. 배낭을 내려놓을 장소를 선택하는 일은 늘 도박 같은 것이어서 바닥에 누울 때 잠의 맛이 어떨지는 알 길이 거의 없다.

비박은 오감(五感)에 절대 민감하다.

일단 추운 날씨에 텐트를 치면 시시각각 얼어붙는다. 밤과 어둠이 만나면 이슬이 된다. 텐트를 에워싸는 공기는 제 스스로 언다. 절대적인 빙점이다. 이슬이 굳어 물이 되는 과정이다. 바깥의 온도와 텐트 안의 기온은 ‘시린 봄’과 ‘시린 몸’이 만나 겨울 같은 봄을 만든다. 하루 종일 라이딩을 하면서 시달렸던 바람소리는 청각을 마비시킨다. 모두가 잠든 밤, 음식냄새는 배고픈 후각을 자극하고, 라면 스프 맛에 섞여버려 바싹 마른 미각은 요동을 친다. 차가운 매트 위의 촉각은 이슬과 냉기를 한꺼번에 점령한다. 완벽한 생존조건을 갖추지 않았을 때의 비박은 야박(野薄) 그 자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비박은 이슬을 맞고 자고, 숙박은 이슬만은 피할 수 있으며, 캠핑카는 이슬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비가 오면 속수무책이다. 비박을 할 경우 사람도, 오토바이도 그대로 물세례다. 그래서 전날 일기예보는 폭탄선언과 같다. 비박을 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비’와 관련이 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갈 시간도 주지 않는다. 다행스럽게 민박을 구했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하루가 되든, 사흘이 되든) 모든 일정을 순연하고 하늘만 쳐다봐야 한다.

비는 여행자에게는 역설적으로 파장(罷場)이다. 산돌림(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은 최악의 불청객이다. 그것도 갈 길이 먼 유랑자에게는 고약한 비애다. 주저앉아 술추렴이나 할 수밖에 없다. 빗방울의 객체는 대지의 접촉면을 상상 이상으로 유린한다.

비박을 포기한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간만의 휴식으로 심신충전을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숙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숙박은 결국 비용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숙박은 여행자의 발목을 잡지만 그래도 유용한 시간을 주기도 한다. 후줄근해진 빨래를 할 수 있고, 밀린 샤워를 할 수 있다. 여기에 몇 일간 보지 못한 프로야구 경기를 편안하게 TV로 감상할 수 있다. 덤은 또 있다. 한기에 얼어붙은 온몸을 지질 수도 있다.

비박의 핵심은 장소다. 맨땅위에 얇은 요를 깔아도 축축하지 않아야 한다. 장소 찾기가 만만치 않다. 야영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오두막이다. 때문에 두려움과도 승부를 해야 한다. 별안간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도 지레 겁을 먹는 게 노숙이다. 소음은 언뜻 추측하기 힘든 두려움을 낳는다. 때문에 얼마나 겁을 먹느냐에 따라 어둠의 부피가 고조된다. 혼자 낯선 장소에 버려졌다는 느낌, 어둠이 의식을 상기시켜 서서히 조여 온다는 아찔함에 전전긍긍하는 게 야숙이다. 비박에 있어 낭만주의는 없다.

해가 뜨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야하는 이유도 아침 묵상(默想) 때문이다. 눈을 떴을 때 태양의 온기를 한껏 받을 수 있도록 채비해 놓는 것, 어둠과 빛 사이에서 절멸하는 굴절의 시간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것, 그것이 비박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제1조건이다. 새벽은 빛으로 산란하고, 빛으로 채워진다. 두려움을 끊고 두려움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야 새우잠을 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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