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선견지명으로 탄생한 지명과 율곡의 선견지명
111. 선견지명으로 탄생한 지명과 율곡의 선견지명
  • 미디어붓
  • 승인 2021.05.3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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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박 모습. 미디어붓DB
비박 모습. 미디어붓DB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관한 한 율곡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시대 아홉 번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한 인물은 이이가 유일하다. 율곡은 스물세 살 때인 1556년 별시에서 학자 수백 명이 몇 달간 고심해 만든 문제를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을 작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만약 율곡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을 선조가 받아들였다면 어찌 됐을까.

조선 중기는 큰 난리가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당시 국방에 관한 일을 하고 있던 율곡 이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썼다. 한번은 지방 군대를 조사했더니 군사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았고, 무기는 창고에서 녹이 슬고 있었다. ‘이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적에게 꼼짝없이 당하겠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이이는 1583년 〈시무육조>라는 장계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나라가 오랜 시간 평화롭다 보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10만의 군사를 길러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벼슬아치들은 이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몇 년 뒤 일본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20여 년간 크고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을 통일했다. 이제 일본 내부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밖으로 눈을 돌려 다른 나라를 침략할지도 모른다.”

선조는 일본에 두 명의 사신을 보내어 일본의 상황을 정확히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두 사신은 돌아와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 한 명은 전쟁 가능성을 얘기했고 한 명은 조선 침략 징조가 없다고 고했다. 조선 조정. 벼슬아치들은 편을 나누어 토론을 벌일 뿐 전쟁에 대한 예비는 하지 않았다.

얼마 뒤 1592년 4월, 일본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에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가 10만 군대를 기르자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지 약 10년 뒤의 일이었다. 만약 10년 전부터 전쟁을 대비했다면 임진왜란도, 조선의 치욕도, 나아가 식민시대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상리(충북 청주시 청원구)

선조들이 지은 땅이름(지명)이 훗날 딱 들어맞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놀랍다. 일찍이 선조들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곳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비하리와 비상리다. 청주국제공항이 들어선 곳으로,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 끝에 있는 동네 이름이 비하리(飛下里)고, 항공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이륙하는 방향으로 난 마을의 이름이 비상리(飛上里)다. 선조들은 일찍이 비행기가 뜨고 앉는 공항이 들어설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충남 서산시 해미면 기지리(機池里)도 예언이 들어맞은 지명중의 하나로 꼽힌다. 20전투비행단 공군 기지가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형이 베틀(명주·무명·삼베 등의 피륙을 짜는)처럼 생겨 기지리라는 지명이 붙였다. 또한 기지리(機池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 논에 두레 10개로 퍼도 마르지 않을 이름난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샘이 무너지지 않도록 둘레에 나무 빈지를 쌓았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지리에 관한 명칭이 확인된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도 기지리가 있다. 산모양이 베틀처럼 생겼고, 그 밑에 못이 있었다 하여 틀못, 틀모시, 틀무시 또는 기지라 했다. 공섬은 독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작은 섬이 있어서 놀이터로 이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숯장수가 살았다 하여 탄장이라고도 부른다. 독골은 틀무시 북쪽 바깥에 있는 마을로 독곡 성석린이 살았다고 한다. 양촌말은 청주 양(楊)씨가 많이 모여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유촌말은 문화 유(柳)씨가 모여 살던 동족촌이다.

북한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6·25전쟁 직전 국군이 철조 콘크리트로 축조한 4개의 진지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영구 진지가 위치한다.

전북 무주군 용담리도 지명처럼 결국은 댐이 건설된 곳이다. ‘용 용(龍)’자에 ‘못 담(潭)자를 쓰는 지명처럼 ‘용이 자리를 틀고 있는 깊은 연못’이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용담댐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조차 지명이 갖는 의미를 그리 많이 알지 못했지만, 댐이 건설되면서 선인들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담댐 주위에 있는 와룡(臥龍)마을과 회룡(回龍)마을도 신비감을 자아내긴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용이 누워있는 모습이고, 전설적인 동물인 용이 승천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물길을 돌고 돌아 하늘로 솟구쳐야 한다는 설명에 근거한다.

이처럼 용담(龍潭)이란 지명을 쓰는 지역은 하천, 호수, 연못 등 물과 연관이 있는 지역이 많다. 남한강이 마을을 돌고 동서로 흐르며, 마을의 큰 늪에 용이 있다하여 붙여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를 비롯해 월계천이 동서로 뻗어 흐르는 경기 여주시 산북면 용담리, 마을 앞으로 원전천이 흐르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이 남북으로 흐르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담리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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