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여행이란 시간이 갈수록 영리해진다
112. 여행이란 시간이 갈수록 영리해진다
  • 미디어붓
  • 승인 2021.06.07 12: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덕 비박 모습. 미디어붓DB
영덕 비박 모습. 미디어붓DB

여행은 즐거운 유희다. 단 장기 레이스일 땐 상황이 다르다. 며칠간은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변수에 직면한다. 느긋함이 초조함으로 변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독기가 없으면 지친다. 아무리 괜찮은 여행일지라도 시간이 불어나면 짜증도 불어난다. 맷집이 필요하다.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신념이 없으면 완패다.

여행자는 영리하다. 시간이 갈수록 여행도 진화한다. 완벽한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여행 내내 시행착오 속에서 헤맨다. 적당한 오류가 아니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충격파가 크다. 우리도 처음엔 ‘짐’과 ‘짐짝’의 관계를 몰랐다. 출발 당시, 오토바이가 쓰러질 정도로 짐칸을 채우고 커다란 여행용 가방까지 덧대어 실었다. 짐을 풀면 어디서든지 잘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씻을 수 있도록 세간을 모두 실은 것이다.

하지만 여행 중 가장 큰 ‘짐’이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짐’이 되고, 짐칸이 사람 자리를 빼앗는 언밸런스한 상황. 마지못해 지고 다니는 짐의 무게는 여행을 짓누른다. 바리바리 싸간 물품 중 불필요한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물론 가지고 다녀서 손해 볼 것은 없지만 ‘없어도 그만’인 물품이 많았던 것이다. 짐이 많으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라이딩의 질도 떨어진다.

방법은 있었다. 버리든가, 집으로 소포(택배)를 부치든가. 우린 입지 않는 옷가지와 신발, 수건,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잡동사니들을 모아 우체국 택배를 통해 반송했다. 이 같은 일은 또 한 번 있었다. 최대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살펴보니 또 ‘한 짐’이었다. 결국 우체국을 또 찾았다. 두 번의 실수는 ‘짐’의 규격화, 최소화를 끌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짐칸을 떼어내고 베니어합판(veneer 合板)과 브래킷(bracket: 지지 구조재)을 연결해 새로운 짐칸도 만들었다. 철물점에서 개조 비용으로 3만 5000원이 들었다.

잠자리에 대한 진화도 있었다. 처음엔 비박과 숙박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헤매기 일쑤였다. 더구나 비박을 하더라도 장소가 문제였다. 학교 운동장이나 천변, 그리고 숲을 생각했지만, 식수와 화장실 모두를 해결할 만한 곳이 흔치 않았다. 야영장이나 캠핑장도 유료가 많았다. 실수에, 실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전국 무료 야영장을 미리 검색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텐트를 치는 거였다. 어떤 날은 태양이 작아서 춥고, 또 어떤 날은 어느 때보다도 일찍 새파란 새벽이 걸어왔기에 예비(豫備)가 상책이었다.

저녁으로 찌개를 끓인 경우 둘이 먹기엔 항상 여분이 생겼다. 이런 음식은 대개 끓여놓으면 상하지 않는 것들이어서 아침 식사로 재생시키기에 충분했다. 한 끼를 두 끼로 만드는 것이니 그만큼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간혹 식당에 가서 남은 반찬이 있으면 깨끗하게 비닐 팩에 담아 밑반찬으로 쓰거나 안주용으로 재활시켰다. 또 해장국이나 뼈다귀 감자탕을 식당에서 구입한 후 야영할 때 끓여 먹는 간편 식사도 종종 했다. 먹기 위해 잠시 멈추는 일은 언제나 축복의 순간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前進)했다는 격려와 보상,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혀끝으로 밀려드는 포만감, 그리고 식욕을 맘껏 펼치며 느끼는 안도감이 좋았다. 특히 입의 즐거움을 위해 만드는 즐거움이 행복의 총량을 넘치게 했다.

기장에 있는 민박집. 미디어붓DB
부산 기장에 있는 민박집. 미디어붓DB

민박 주인이 들으면 싫어할 소리지만 간혹 숙박할 경우엔 밀린 빨래와 밀렸던 목욕을 충분히 했다. 씻는 것도 하나의 여정이어서 기회가 올 때마다 때 빼고 광을 냈다.

오토바이 엔진오일(Oil)을 직접 교체한다거나 아메리카노 커피 ‘카누’를 도매로 사서 저렴하게 모닝커피를 먹었던 일, 와이파이(Wi-Fi) 터지는 곳에서 무제한 데이터 쓰기, 열 벌의 옷보다 전북 군산 양키 시장에서 구입한 미제 담요 덕을 더 본 점도 진화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소박함은 자존감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박한 여행을 위해서는 일단 두 가지를 버려야 한다. 시간과 욕망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누추함과 다르다. 누추한 것은 더럽고 지저분한 표현으로 끝이다. 하지만 소박한 것은 유홍준 교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백제의 미학을 표현할 때 쓴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다.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부닥쳐봐야 해결방법이 보인다. 아무리 계획을 잘 짰다고 해도 직면한 문제는 맞닥뜨려야 풀린다. 여행의 비극은 실패가 아닌 현실 안주에서 비롯된다. 가볍게 여장(旅裝)을 꾸리는 일은 정신을 가볍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이다.


  • 세종특별자치시 마음로 14 (가락마을6단지) 상가 1층 3호 리더스
  • 대표전화 : 044-863-3111
  • 팩스 : 044-863-3110
  • 편집국장·청소년보호책임자 : 나재필
  • 법인명 : 주식회사 미디어붓
  • 제호 : 미디어 붓 mediaboot
  • 등록번호 : 세종 아 00075
  • 등록일 : 2018년 11월1일
  • 발행일 : 2018년 12월3일
  • 발행·편집인 : 미디어붓 대표이사 나인문
  • 미디어 붓 mediaboot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미디어 붓 mediaboot.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ediaboot@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