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굶주린 요부가 아니라 사랑에 굶주린 ‘꽃’
114. 굶주린 요부가 아니라 사랑에 굶주린 ‘꽃’
  • 미디어붓
  • 승인 2021.06.2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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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상궁리. 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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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좋아진다. 꽃이 좋아지는 건 세월의 낡음이니, 역설이다. 스마트폰으로 꽃을 찍는 사람의 8할은 중년이다. 왜 찍는지 자신도 모른다. 그냥 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사소한 행위는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기록하는 일이다.

삶의 궤적과 족적을 남겨 하루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인 없는 꽃은, 꽃 세(稅)를 내지 않아도 마음껏 볼 수 있다. 결국 주인 없는 꽃은 주인 없는 꿈이다. 허락받지 않고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주인 없는 그 꽃의 정령은 꽃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조선 성종 시대를 뒤흔든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은 버려진 꽃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기생으로 전업해 왕실의 종친들과 놀아났다. 그녀는 꽃이 피고 달이 밝은 저녁이 되면 정욕(情慾)을 참지 못했다. 왕실, 평민, 노비와 운우지정을 나눴다. 그녀에게 홀린 수십 명은 귀양을 갔고 어우동 또한 교형(絞刑:목을 매어 죽임)에 처해졌다.

또 한 명의 ‘주인 없는 꽃’ 유감동(兪甘同)은 세종 시대의 기생이다. 그녀 또한 본래는 양반 가문 출신 여성이었으나 외간남자(外間男子)에게 강간당한 후 남편에게 버려졌다. 이후 간통한 남자가 40명이다. 세종은 교형에 처해달라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려 귀양 보냈다. 버려진 꽃이, 꽃이 되고자 했으나 또 버려진 것이다.

어우동과 유감동은 기생이었지만 시인이었다. 이들은 버려졌으나, 버려진 것 또한 아니다. 그들도 버린 자를 버리기 위해 다시 꽃을 피웠다. 씨방을 열고 한껏 몸을 달궜다. 배겨날 수컷은 없었다. 눈물로 피워냈기에 그 향이 짙고 독했다. 나비도 모으고 새도 모아 더 많은 씨앗을 잉태했다. 복수다. 명예수복을 위한 벼름이었다.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사랑을 희롱한 치명적인 ‘꽃’이었다. 주인 없는 꿈이었다. 과연 두 여인이 꿈꾸고자 했던 조선 시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단언컨대, 이들은 굶주린 요부가 아니라, 사랑에 굶주린 그냥 ‘꽃’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금기와 억압 속에 ‘꽃’들이 명멸했다. 이들은 손가락질 당했지만 제도 밖에, 집 밖에 있었다. 이제 딸의, 딸들은 더 이상 주어진 팔자를 끼고 살지 않는다. 스스로 치명적인 향기를 풍긴다. 민초(民草·백성)들은 주인 없는 꽃으로 살았지만, 이제 그 꿈을 좇지 않는다.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꽃이 아니다. 버려진 꿈이 아니라, 버릴 꿈들이다.

예산 상궁리. 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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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리(충북 보은군 내북면)

상궁(尙宮)은 4품 이상의 품계에는 오르지 못하던 조선 시대 내명부(內命婦)에 속하는 정5품 벼슬이다. 상궁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어른 상궁은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불렸다. 내전의 어명을 받들며, 대소치산(大小治産)을 관장했다. 왕을 가까이 모시기 때문에 권세를 쥔 상궁이 많았으며, 부하 나인들에게는 두렵고 어려운 존재였다. 두 번째가 제조상궁 버금의 위치에 있는 부제조상궁으로, 아리고(阿里庫)상궁이라고도 했다. 내전 별고(內殿別庫)를 관리하고 옷감·그릇 등 안곳간(內庫間)의 출납을 관장했다.

다음으로 대령(待令)상궁으로 대전(大殿) 좌우에 시위(侍衛)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임금을 모시는 상궁이었다. 지밀(至密)상궁이라고도 한다. 보모(保姆)상궁은 왕자·왕녀의 양육을 도맡은 나인(內人) 중의 총책임자로서 동궁(東宮)을 비롯하여 각 왕자녀궁에 1명씩 있었다.

시녀(侍女) 상궁은 주로 지밀에서만 봉사하여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거나 문서의 정서, 대·소 잔치 때 시위(侍衛)와 승도(承導)의 일을 담당하며, 왕·대왕대비·왕비에게는 계청(啓請)·찬례(賛禮)·전도(前導)·승인(承引)·시위의 일을 하고, 왕세자·세자빈에게는 승도·배위(陪衛)·찬청(賛請)·전인(前引)의 일을 담당했다. 또한, 안으로는 상궁 나인들과 밖으로는 종친·조신(朝臣) 집안 부녀들에 대한 품사(稟賜)와 규찰을 하며, 곡읍(哭泣)의 일과 대·소 사우(祠宇)를 관장했다고 한다. 문제는 궁에 들어오면 늙고 병들기 전까지는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단, 모시던 분이 승하할 경우 3년 상을 치른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1926년 순종황제 승하 3개월 전의 창덕궁 나인에게 지급됐던 월봉명세서에 따르면 가장 높은 보수를 받았던 이는 잠시도 떠나지 않고 대전에서 임금을 모셨던 지밀상궁으로서 당시 월급이 196원(현재 금액으로 200만 원가량으로 추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궁녀들은 맡은 일, 연차, 품계에 따라 받는 월급이 달랐으므로 지밀 중 가장 적은 액수를 받은 이는 50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40원부터 95원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충북 보은군 내북면 상궁리(上弓里)는 궁뜰 위쪽에 위치해 있어 불리게 된 마을이다. 웃궁들 또는 상궁평이라고도 했다.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上宮里)는 자연마을인 방리, 상리, 궁리 등을 병합하여 상리와 궁리의 이름을 따서 상궁리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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