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20대 청춘은 축내는 것이 아닌 보약 같은 경험칙
116. 20대 청춘은 축내는 것이 아닌 보약 같은 경험칙
  • 미디어붓
  • 승인 2021.07.0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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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축내리 전경. 미디어붓DB
전남 보성 축내리 전경. 미디어붓DB

20대 청춘의 어느 언저리에서, 그것도 차디찬 자취방에서 라면을 먹고 있으면 웃음이 피식 나왔다. 눈물 같은 웃음이었다. 어쩌면 비참함을 숨기기 위한 반어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라면도 가난했고, 먹는 자도 가난했다. 라면도 외로웠고, 먹는 자도 외로웠다. 라면처럼 가난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음식은 흔치 않다.

시골에서 용돈이 오면 제일 먼저 라면을 샀고, 라면이 떨어지면 ‘국수 같은 라면’을 먹었다. 국수 7할에 라면 3할을 섞은 것이다. 라면 같기도 하고, 국수 같기도 한 이 정체불명의 맛을 보면 또 웃음이 나왔다. 면은 국수 맛, 국물은 라면 맛이었다. 어떤 날엔 한 끼에 라면 2~3개를 먹어치우기도 했다. 골방처럼 어둡고 퀴퀴한 그 창백한 국물이 마음 깊은 곳까지 위로한 까닭이다. 라면은 간식이 아니라 절박한 끼니였다.

‘라면’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피크닉 갈 때도 라면부터 챙기고, 주전부리가 생각날 때도 과자보다 생라면을 씹는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라면 가닥에 붙어있는 맵짜면서도 애달픈 감상 탓이 크다. 팅팅 불어터진 면발을 보노라면 마치 불어터진 과거 같다. 그 짭조름한 감칠맛은, 저렴하고도 습관적인 맛이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고, 배가 불러도 밥을 말아 먹어야 끝이 나는, 그 지난한 마무리는 습관이 아니라 위로다. 그 가난한 맛은 우리네 정서와 닮았다.

언젠가 아들이 아르바이트 첫 월급으로 라면을 사주었을 때 그 ‘진부한 선물’에 감격했다. 그 ‘애틋하고 짠해서’ 목 넘김이 안 되는 해쓱한 국물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국물을 먹어야 슬픔이 가라앉는 건 유년의 식성이다. 라면에 갖은 식재료를 넣지 않는 것도 그때의 입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잊지 않기 위해서다. 라면을 보면 돌아보게 된다. 먹고 살기 어려워 라면조차 맘대로 먹지 못했던 과거와, 라면만큼은 맘대로 먹을 수 있는 현재의 기억을 즐기는 것이다. 라면에 관한 소고는 혼자서 절망을 씹고, 외로움을 씹고, 눈물을 삼키던 값싼 운명과도 연결된다. 젊음을 축내고, 건강을 축내고, 눈물을 축내던 그 맛, 꼬불꼬불 맹장을 뒤트는 유한의 욕망이 잊히질 않는다.

축내리(전남 보성군 조성면)

일정한 수나 양에서 모자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을 축낸다고 한다. 또한 몸이나 얼굴에서 살이 빠지면 축났다고 한다. ‘축내다’에서 축은 ‘오그라들 축(縮)’자를 써 ‘오그라들게 하다’라는 뜻으로 ‘모자람이 생기게 하다’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하릴없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는 말은 잔인한 농(弄)이다.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는 삼식이나 두 끼 먹는 두식이, 한 끼 먹는 일식이 보다 하루 세끼를 모두 밖에서 해결하는 ‘영식이’를 좋아한다는 웃픈 시대상은 비극이다.

밥벌레 소리 듣지 않으려면 그까짓 거 부엌에 들어가면 된다. 서투른 솜씨로라도 아내를 위해 식탁을 차릴 때 삼식이는 다시 태어난다. 무엇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레시피는 인터넷에 널려 있으니까. 셰프(chef)나 달인처럼 현란한 칼질도 필요 없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요란한 재료를 뿌리며 스테이크를 굽는 것만 섹시한 게 아니다. 부엌을 어지럽히고 손을 데이더라도 부인을 위해 한 끼를 준비하는 남편이 바로 섹시한 남자다. 요리는 ‘미고사축’(미안해요·고마워요·사랑해요·축복해요)을 전하는 러브레터다. ‘곁에 있어 줘 고맙다’는 인사다. 둘만을 위한 리얼리티 먹방 로맨스다.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 ‘축내리’란 동네가 있다. 방죽 안쪽(築內)의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중심에 정자나무 3그루가 있다 하여 삼정(三亭)이란 자연마을이 있고, 특산물로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는 용문석이 있다. 탐진강이 마을 동쪽으로 흐르는 전남 장흥군 장흥읍 축내리(築內里) 역시, 마을에 방죽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같은 장흥군 장평면에도 축내리(丑內里)가 있는데, 이곳은 마을 뒷등의 형국이 소와 같다고 해서 ‘소 축(丑)’자를 써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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