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가슴에 불이 나는 부나비 같은 세상살이
118. 가슴에 불이 나는 부나비 같은 세상살이
  • 미디어붓
  • 승인 2021.07.1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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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방화리. 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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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외롭고 불안한 시대다. 문제는 가족·공동체가 약해지고 개인이 파편화됐다는 점이다. 어쩌면 곁에 있는 사람은 같이 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불편하고 위험한 이웃이다. 애걸복걸하는 사람에게 구걸하지 않으려면 능멸하는 자를 능멸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게 아니다. 삶의 여유를 물외에서 누리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우리’여야 한다.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은 모두의 ‘하루’다. 반복을 견디는 게 삶이다. 튀어봤자, 하루 세끼 먹을 뿐이다.

가끔은 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도 있다. 민심의 촛불이다. 그 촛불은 불꽃이 아니라 불같은 분노다. 공권력에도 스러지지 않고, 어떠한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함성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은 희생을 감수한 절절한 외침이다.

시인 김지하가 반골이 된 것은 대학생 때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다 수배를 당해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때 중앙정보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반신불구로 만들었다. 김지하는 새벽녘 산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눈물로 맹세했다. 이 세상에서 일체의 압제와 거짓이 사라질 때까지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이후 그의 시는 만인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는 횃불로 타올랐다. 횃불은 민심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 타오르는 시뻘건 불이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마구잡이로 가져오려 하자 성난 촛불이 켜졌다. 촛불은 무동 탄 아이들, 여중생, 유모차 부대, 하이힐 신은 처녀, 지팡이 짚은 노인을 광장으로 불러냈다. MB정부의 비정(秕政)을 개탄하는 촛불은 그렇게 점화됐다. 그 촛불은 안전한 식탁 주권을 찾기 위한 ‘신선한’ 항쟁이었다. 4대강 사업도 그랬다. 불도저로 강산을 파헤치며 23조 원의 혈세를 퍼부었다. ‘부자 감세’ 정책으로 고소득층의 1인당 감세액이 중산·서민층의 33배에 이르고, 대기업에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액도 중소기업의 11배에 달했다. 신용불량 1000만 명, 비정규직 1000만 명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국민들은 박근혜·최순실을 향해서도 최대한 높게 촛불을 들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단죄한 것이다. 농단(壟斷)은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언덕으로 혼자서 이익을 독차지함을 뜻한다. 촛불은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정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피어오른다. 촛불은 비폭력을 외칠 때 춤과 노래가 된다. 그 때문에 아무리 공권력을 투입해도 ‘불나방’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들이 자식의 안위가 걱정될 때 개다리소반과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치성을 드린 촛불은 컴컴함 속에서 하얗게 빛난다. 그래서 ‘흰 그늘’이고 하얀 눈물이다.

하동 방화리. 미디어붓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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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리(방화마을)(경남 하동군 북천면)

“헐~ 이 양반들! 참 큰 일 날 사람들일세.”

“누구 마음에 불을 지르겠다는 말이야?”

“모르지. 처녀 가슴에 불을 질러도 큰일인데, 뉘 집에 불을 놓으면 더 큰 일 아닌가.”

여행길에 만난 방화리(방화마을) 푯말을 보며 눈이 번쩍 뜨였다. 일부러 불을 지르는 방화(放火)일리는 없을 텐데 이정표에 순간 놀랐던 것이다. 물론 오해였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방화리(芳華里·방화마을)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뒷산의 생김새가 디딜방아와 같다 하여 방화리이고, 또 하나는 뒷산인 구곡산 주변이 꽃잎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북 순창군 구림면에도 방화리(芳花里)가 있다. 방화(芳花)는 해당화 꽃이 이슬을 머금은 모양인 해당함로(海棠含露)의 형상을 지녔다 하여 향기로운 꽃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방화재(芳花在)에서 유래했다. 충효 사상이 특출한 마을로 효자가 많이 배출돼 마을 입구에는 비각도 서 있다.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의 1963년 이전 명칭도 방화리(傍花里)였다.

때때로 마음속에 불이 타오를 때가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닐진대 마음의 중력이 무시로 가볍다. 인생의 절반을 이웃과 이웃하지 않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외로움은 지병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두려운 일은, 바로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배지가 아닌 곳에서 유배의 느낌으로 산다는 건 슬프다. 혈연공동체의 이 병약한 징조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자학일 뿐이다. 그리움의 감정은 습지대 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번 발을 넣으면 좀처럼 빼내기 어렵다. 그럴 땐 악착같이 변명한다. “그래, 이건 외로운 게 아니라 외로운 척하는 거야….”

인생에서 여러 번 깨져보면 마음에 굳은살이 생긴다. 그렇다고 계속 평안하지는 않다. 모든 걸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연습 중이다. 연습은 언제라도 중단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보편적으로 삶의 겉치레와 허명은 극히 이기적이다. 공동운명체가 아니라 개인 운명체다. 그들은 부나비처럼 불 옆에 가지 않는다. ‘너를 안아주려고 불타는 것이 아니라 너를 태워서 삶을 앗아가려고 하는 것’임을 눈치 챈다. 그래서 공동체의 내밀한 규칙이나 관습, 묵계에서 줄행랑을 치곤 한다. 그 정신의 가벼움은 영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둔한 행보다. 지금 겪는 일이 싫어서 도망치는 것보다 겪으면서 그 느낌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물에 빠진 사람은 더 밑으로 내려가 바닥을 차고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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