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단상]낙엽은 겨울 木雨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은 저문다'
[늦가을 단상]낙엽은 겨울 木雨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은 저문다'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0.11.24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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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
오동잎은 떨어져도 나무는 꺾이지 않고 본래의 삶 사는 법
잎들은 제 몸 완전히 소진해 나무의 생장 돕는 숭고한 윤회
떠나야할 것들이, 떠나지 않고 떠남을 강요하는건 이율배반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오동잎이 떨어지면 천하에 가을이 온 걸 안다. 반면 비파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비파만취오동조조(枇杷晩翠梧桐早凋). 비파나무 잎사귀는 늦도록 푸르고, 오동나무 잎사귀는 일찍 시들어버린다. 때문에 현자들은 비파나무를 ‘변하지 않는 절개’라 했고, 오동나무는 세월의 추이를 알게 하는 일엽지추(一葉知秋)라 했다.

그런데 뭣 모르는 장삼이사들은 이를 두고 오동잎이 떨어지면 떠나야한다고 풀이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주석(註釋)까지 단다. 이는 사족에 가깝다. 하지만 오동잎이 떨어지면 떠나야한다는 말은 다분히 세속적이고 주관적이다. 행간 사이에는 굴종과 고독, 회한, 증오, 원망의 그늘이 그득하다. 이건 세상을 바라보는 느긋한 자의 관조가 아니라, 낙(樂)을 낙(樂)으로 보지 않고 있고, 오롯이 낙(落)으로 보는 옹색함에 근원한다. 겉만 보는 근시안적 시선, 그 오지랖은 겸손하지 않고 추비하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사람은 없다. 떠나고 싶어서 안달 난 생물도 없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가벼운 질량의 언어 또한 없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건 ‘떠남’이 아니라 내일을 향한 ‘채비’다.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물을 보는 관점은 사물을 보는 사람의 그릇이다. 담을 수 있는 품, 포용할 수 있는 사려의 크기가 거기서 정해진다. 겉만 보는 박명(薄明)의 시선으로는 나무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익은 벼가 고개를 괜히 숙이는 게 아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모든 나무들의 ‘잎’은 눈물처럼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는 건 몽니가 아니라 낮춤이다. 내일을 향한 새로운 채비이기도 하다. 식물들도 겨울을 준비한다. 잎은 제 몸을 태워 나무에게 주고, 살아남은 줄기는 뿌리나 씨앗으로 이듬해를 준비한다. 그래서 낙엽은 주검이 아니라 양분이다. 결국 나뭇잎의 생(生)은 나무의 생몰(生沒)과 함께한다. 자기 주검으로 말미암아 나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때문에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 자란 나무 한 그루에는 대략 2만~10만 장의 잎이 달린다, 아주 커다란 나무는 100만 장에 가깝다. 차지하는 땅의 면적보다, 달고 있는 잎의 면적이 훨씬 넓은 나무는 그래서 효율적이다. 잎은 거름이 되고, 다시 태어난 잎은 이듬해의 거름이 되면서 윤회한다.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나무는 제도권 안에 있어야 나무다. 제도권 밖, 울타리 밖에 있으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오동나무의 입관(入棺)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그들의 생로병사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가벼운 질량의 인간들과 오동나무 희로애락의 총량은 같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것은 ‘나를 좀 봐달라는 간절한 외침’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으로 족하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온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도 겨울은 간다. 아무리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꽃은 피어난다.

찬바람이 옷깃에 닿으면 사람 마음이 얼어붙는다. 가을 끝에서부터 겨울 초입에 이르기까지 이 고약한 빙점은 따뜻해지고 싶은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어쩌면 ‘가을 탄다’는 말보다는 ‘겨울 탄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런 계절에 사람이 더 옹색해보이는 건, 사람 자체에 원인이 있지 않다. 괜히 몽니 부리고 생짜 부리는 군상들의 주름진 시간들이 유죄다.

짖어대는 개는 물지 못한다. 짖는 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간곡한 요청이다. 만약 물어뜯을 자신이 있는 개라면 짖지 않고, 기다렸다가 물어뜯는다. 자신이 없으니 짖는 것이고, 자신이 없으니 피해갈 궁리를 하는 것이다.

오동나무와 비파나무가 주는 교훈은 그 ‘잎사귀’에 있지 않고 ‘나무’에 있다. 잘린 둥치에는 ‘잎’이 존재하지 않는다. ‘잎’이 없으니 당연히 ‘낙엽’도 없다. 썩은 나무에 종균이 피는 건 기생(寄生)이 아니라, 완전한 소진이다. 어떤 존재든 간에 한번은 떠난다. 언젠가는 떠날 것인데 떠남을 채근하는 건 순리에도 어긋나고 비열하다. 문제는 떠나야할 것들이, 떠나지 않고 떠남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떠난다는 건 비우는 일인데, 이 또한 비우지 못하니 아둔하고 어리석다.

세상이 소란스러운 것은 ‘사람의 잎사귀’가 이미 계절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편 가르기와 집착, 반목과 질시, 강샘과 증오, 거짓과 험담, 이간질이 난무하기에 소란스러운 것이다. 갈매기가 오래 못사는 건 두려움과 짜증, 그리고 지루함 탓이다. 같은 지역을 빙빙 돌면서 한정된 먹이를 찾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웃음이 나질 않는 것이다.
누군가가 슬프다면 ‘누군가’만 슬프다. 누군가는 묻히고, 누군가는 잊힌다. 또한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는 탄생한다. ‘부고란’과 ‘결혼 알림란’이 서로 이웃하듯 인생의 시작과 끝은 이웃한다. 인간은 2억년을 통해 만들어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이나, 잠시도 인간답지 못하다. 최소한 살아있다면, 온전한 마음을 갖춰야하는데 참으로 별나게 산다.

이 겨울의 우울 또한 시대의 불통에서 시작됐다. ‘마지막’을 노추(老醜)로 장식하지 않으려면 ‘시기와 모략’의 감정을 버려야하고 비워야 한다. 겨울의 아름다움은 다 버림으로써 채워진다. 겨울도 직접 마주하면 따듯해진다. 겨울이란 헐벗기에 서정시를 낳는 것 아닌가. ‘온당한 세상’에선 어제의 말(言)과 그 말의 이유가 정당해야 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가장 슬프다고 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정점(頂點)이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8개월 동안 준비해 한 달 정도 핀다. 얼굴을 활짝 편 해바라기는 꽃잎을 드러내고 씨마저도 숨기지 않는다. 해바라기를 두고 ‘변절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줏대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해바라기는 변절하지 않고 애면글면 태양만 바라보고 사는 충정의 꽃이다. 변절의 삶을 사는 자들은 똑똑한 척 하지만 무례하다. 남을 배신하고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능욕하는 일이다. 충정의 꽃은 못 피울지언정 변절의 꽃으로 살아선 안 된다. 진정한 용기는 적의 범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영의 범죄를 고발하는 것이다. 가벼움이 때론 무거움을 지배한다.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많은 곁가지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 곁가지는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그냥 곁가지 일뿐이다. 곁가지는 눈엣가시여서 싹을 잘라줘야 가지가 더 굵고 튼튼하게 자란다. 자신에게 생긴 모난 가지를 자르지 않고, 밑동만 쳐다보고 있다면 나무는 생장점을 잃는다. 때문에 곁가지로 사는 건, 나무를 부러워하는 그릇된 생존법이다.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늦가을 풍경. 연합뉴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남의 구두를 신어보는 일’이다. 자신의 발에 맞는 것인지를 재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발이 아프지는 않은지 염려하는 배려다. 자기 발에 맞지 않는다고 그냥 꺾어 신으라고 말하는 건 ‘자아 분열’이다. 불손하다. 선입견 없는 중용의 무게가 중요하다. 거울에 비친 당신은 누군가가 지켜보는 또 다른 당신이다. 부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뭐 눈엔 뭐만 보인다. 단언컨대, 역지사지를 모르는 장삼이사들의 타령조는 그냥 푸념일 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오동잎이 떨어진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떨어지니 절멸이라고 하지만, 그건 불멸이다. 떠나야할 때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기 위해 떨어지는 것이다. 떠날 줄 알기에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가을 끝에 빈 몸이 돼버린 낙엽은 이제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다. 낙엽은 차디찬 겨울을 이겨내고 따뜻한 봄날이 왔을 때, 어느 나무의 숭고한 생명으로 잉태될 것이다. 그리고 푸르른 상록수로, 푸르른 잎을 틔우며 지나간 낙엽의 생애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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