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시대, 불명(不明)의 화두를 잡고서
불면의 시대, 불명(不明)의 화두를 잡고서
  • 나재필 기자
  • 승인 2021.05.18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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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필의 문방사우]
계족산 황톳길. 기사와 관련없음. 대전시 제공
계족산 황톳길. 기사와 관련없음. 대전시 제공

새벽의 몽진(蒙塵)은 차갑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는 더욱 짙다. 모두들 의식을 끄고 자고 있을 사위는 적요하다. 그런 미명의 아침에 화두를 잡고 산(山)에 오른다. 과연 인생의 행로에서 잘 가고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 캐묻는다. 물론 화두의 끝에는 늘 정답이 없으나 매일 묻고 또 묻는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 조금 이르게 아침을 맞는 건 불편이 아니라 호사다. 산(山)조차도 차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에 세상은 온통 정적과 침묵뿐이다. 저만치 여명의 시간들도 새들과 청록의 나무를 흔들어 깨우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세상은 깨어나기 위해 모두 잠들어있다.

93세 장모님이 주무신다. 주무시고 또 주무신다. 하루의 일과가 잠에서 시작해 잠으로 끝난다. 최소한의 움직임을 빼고는 계속 취침 중이다. 인간의 수명을 90세로 따지면 보통 30년을 잔다. 하루 8시간 기준이다. 잠자는 시간을 1년으로 치면 2920시간, 90년 전체를 통틀어 계산하면 26만 2800시간이요, 1만950일이다. 인생 전체 3분의 1을 자는 셈이다. 더구나 하루에 8시간 이상 잔다고 하면 어마어마한 시간을 잠에게 할애한다.

즐기기에도 바쁘고, 살아가기에도 바쁘지만 8시간을 자야 건강해진다고 하니 어쩔 수는 없다. 행복해지기에도, 사랑하기에도 시간은 빠듯하다. 그런데도 우린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흔히들 나이가 들수록 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다. 몸에 기력이 빠지면 자고 싶지 않아도 잠에 빠진다. 잠이 달콤해서가 아니다. 자기 싫은데도 잠이 쏟아진다. 자연스럽게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인생의 종착지에 점점 더 다가섰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남아있는 시간들이 아까울 법도 한데 자고 또 잔다. 이것은 ‘세상에 태어나 기어 다니고, 다시 기어 다니면서 죽음에 이르는’ 처절한 생로병사의 스케줄과 비슷하다. 장모님은 말씀하신다. ‘그냥 자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결국 잠이란 죽음이요, 죽음 또한 잠자는 것과 같다. 물론 ‘영원함’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살면서, 잠과 싸우지 않은 것은 실로 최근의 일이다. 항상 불면에 시달렸고 그 불면의 끝에서 처절하게 아파했다. 한때 오랜 기간 눈을 감고 잘 수가 없었다. 눈만 감고 있었지, 의식은 내내 깨어있었다. 그래서 물고기처럼 눈을 뜨고, 돌고래처럼 잠시 동안만 깊은 잠을 잤다. 마치 양계장의 육계(肉鷄) 같았다. 40여일 간 잠을 자지 않고 사료만 먹는 육계는 살이 피둥피둥해져 살만해지면 사람이 잡아먹는다. 닭이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새벽의 초침소리는 닭이 양푼을 쪼는 소리처럼 크다. 귓전을 울리는 타종소리는 선문답을 쉴 새 없이 공중 부양한다. 단순하게 모기 한 마리에도 잠은 달아난다. 그럴 때면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실컷 빨아라. 실컷 먹고 배가 터져 죽어라’라고.

어릴 적 꿈은 지긋지긋한 농촌의 노동에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거였다. 물론 아버지의 꿈도 몰랐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해떨어지는 순간까지 그냥 일만 했다. 그래서 그 눈물의 의미도 몰랐다. 아버지의 꿈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했다. 밤낮 없이 일을 해도 꿈은 보이지 않았다. 꿈은 꿈으로 끝나는 법이니까. 꿈은 전진하지 않는다. 꿈길밖에 길이 없다면야 모르지만, 꿈은 꾼다고 해서 꾸어지지 않는다. 꿈에서조차 이룰 수 없는 꿈은 이미 꿈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꿈은 소멸되고 자꾸 놀고 싶어진다. 어릴 적 놀지 못했던 그 아련한 상실감이, 어른이 된 지금 더더욱 강렬해진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점점 더 줄어드는 것에 대한 초조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월은 가고, 유희(遊戱)의 시간은 분초를 다투며 절박해지고 있다.

“아빠의 꿈은 뭐야?”(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크는 것) “아니, 아빠의 꿈?”(그래. 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 너희들이 꿈이니, 내 꿈은 없는 거야) 이것이 아빠들의 꿈이다. 

오늘도 ‘기린의 잠’을 자고 다시 산(山)을 향한다. 기린은 하루 평균 10분에서 2시간 밖에 자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초식동물의 비애다. 육식동물의 공격 때문에 렘(REM.몸은 자고 있으나 뇌는 깨어 있음) 수면을 하기 때문이다. 잠을 자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또 다시 잠을 자야하는 기나긴 여정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고 싶다. 그것이 설령 건강해지지 않는 금욕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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