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이끈 '홍범도 장군' 광복절에 고국품으로 돌아온다
봉오동 전투 이끈 '홍범도 장군' 광복절에 고국품으로 돌아온다
  • 나인문 기자
  • 승인 2021.08.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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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승리의 주역…해방 후 남북한 모두에 소외되기도
16~17일 국민 추모기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
독립기념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기념' 자료 기증식 및 특별 강연회 개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 장군(左)과 최진동 장군(右) (1922년 1월). 독립기념관 제공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 장군(左)과 최진동 장군(右) (1922년 1월). 독립기념관 제공

광복절에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가 국내에 봉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국민대표 자격으로 배우 조진웅씨가 참여한다. 박 대변인은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민족정기 선양, 국민 애국심 고취,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함양,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해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토벌해 '독립전쟁의 전설'로 통하는 그는 일본군에게는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존재였고, 한국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으로 불릴 만큼 추앙받았다. 부하들은 함께 노동하고 고난을 나누며 투쟁했던 그를 존경과 사랑을 담아 '홍 대장'으로 부르기도 했다.

1868년 8월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발군의 사격 실력을 바탕으로 구한말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타격을 줬다. 필사본만 전하는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홍 장군을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벌인 최초의 전투였다. 이듬해에는 독립운동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인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 명에 달하지만,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범도 사진(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대회)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대회 홍범도. 독립기념관 제공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만주 지역 독립군의 항일독립의지가 크게 고무됐고,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는 게 국가보훈처의 평가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무찌른 것이 청산리 전투다. 홍 장군은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1921년 1월 만주에서 다시 연해주로 옮겨간 그는 같은 해 6월 '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레닌을 접견하고 레닌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받기도 했다. 이는 해방 후 반공을 국시로 한 남쪽에서 그가 한동안 철저하게 배척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37년 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4월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극장의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올라 한때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립기념관은 17일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기념 자료기증 및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고,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 담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석한 영상 자료와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홍범도 장군 관련 자료들을 소개한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영상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까지 유일한 자료다. 독립기념관은 이번 행사에서 ‘홍범도 일지’와 ‘봉오동전투상보’, 1912년과 1922년에 촬영된 홍범도 사진 2점 등 소장 중인 홍범도 장군 관련 자료 15점을 함께 소개하며, 영상 자료를 기증한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특별 강연을 진행한다.

이번 행사는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서거한 이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는 것이다. 이번에 기증받은 영상자료 상연 행사는 올해 8월 15일 정식 개관한 독립기념관 MR독립영상관 내 4DX관에서 진행된다. 독립기념관은 향후 해당 자료를 전시 및 연구·교육 등에 활용해 홍범도의 활동과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널리 알리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봉오동전투상보 내지. 독립기념관 제공
봉오동전투상보 내지. 독립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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