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노래 만들다보니 1000곡"
"詩노래 만들다보니 1000곡"
  • 나재필 기자
  • 승인 2018.12.12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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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필의 feel]가수 정진채(진채밴드 리더·드림뮤직 대표)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전설이 된 로큰롤그룹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비트(beat)는 마치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이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담는다. 그래서인지 요즘 보컬음악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 가수 정진채(진채밴드 리더·드림뮤직 대표)는 비주류 같은 주류로 세상을 주유하며 인디음악을 고수한다. 그에게 음악이란 생명과도 같다.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보헤미안적 성향은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세상을 한없이 위로하고 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로커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느낌은.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얄팍한 음악시장을 실감하게 된다. 그냥 유행처럼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와 퀸을 좋아하나.

“나의 음악 성향 상 진중하지 못한 것 같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호감을 갖게 됐다. 나와 주변 예술가들의 스토리와 닮아있다. 묘한 동질감에 전율을 느꼈다.”

-그룹사운드 ‘백마들’의 보컬리스트였다. 당시를 소개해 달라.

“나의 첫 밴드였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싶다. 그때는 참 어수룩한 아마추어였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음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줬다. 짧은 시절이었지만 스쿨밴드의 전통은 아직도 이어지기 때문에 백마들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당시 그는 학과공부에 뜻이 없었다. 그래서 1학기를 마치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삶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군악대가 아닌, 철원에서 포병생활을 했고, 그곳에서도 밴드를 만들었다. 부대회식에서 노래·연주를 해 인기가 꽤 좋았다고 한다.

-복학한 후 대학시절은 어땠나.

“"창작음악을 하는 팀들을 찾아다녔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는 너무 상업적이어서 도전할 생각조차 없었다. 대중음악은 자본이 투하된 만큼 실적에 민감해 상업적일 수밖에 없고 뮤지션들도 맘대로 예술적 도전을 기하기가 어렵다. 어느 정도 개성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줄곧 인디밴드의 세계에서 창작음악만 고집했다. 솔직히 음악으로 폼 좀 잡았던 시기였다.”

대학 보컬리스트·민중가요밴드 활동···이제는 詩노래에 흠뻑 빠졌죠

그는 민중가요밴드 ‘노래로 그리는 나라’, 블루스 밴드 ‘유리’에서도 활동했다. 이전 음악의 주제가 ‘나’였다면 이 시기의 주제는 ‘음악의 사회성’이었다고 한다. ‘나’를 벗어나 ‘우리’로 영역이 확장됐고 ‘갇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광범위해졌다고 말했다.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다. 지역작가들의 글에 곡에 쓰게 된 계기는.

“내가 가사와 곡을 다 쓰던 시절에는 아마도 1년에 서너 곡 정도의 곡을 썼던 것 같다. 하지만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이면서 다작이 가능해졌다. 가사를 쓰는 것이 곡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었고 시노래를 하면서 그 고민이 해결됐다. 지금도 1년에 몇 곡 정도는 가사를 쓰지만 곡은 아마도 수십 곡을 쓰는 것 같다. 또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대중적 공감이 되는 시를 노래로 만들어 좀 더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반응은 어떤가.

“반반인 것 같다. 예전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예전의 나의 음악이 더 좋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은 좀 더 친숙한 시노래를 나의 음악으로 기억한다. 둘 다 나에게서 나온 음악이다. 굳이 구별하고 싶지 않다.”

-언제 음악을 시작하게 됐나.

“중학교 2학년 때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무엇엔가 홀린 듯 음악이 무작정 좋았다.”

-고교 시절은 어땠나.

“남녀공학인 논산 연무고등학교를 다녔다.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던 것 같다.(웃음) 소풍 때 자작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고 가끔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나름 학생뮤지션이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 얘기 좀 해 달라.

“탑정호가 내려다보이는 논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5녀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농촌의 주름진 삶이 그렇듯 푸성귀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보리밥에 물을 말고, 된장에 고추 찍어먹는 걸 무척 좋아했다. 여름방학이면 탑정호 지류에서 하루 종일 수렵과 멱 감기를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야 대전에 처음 왔을 만큼 촌놈 중의 촌놈이었다.”(웃음)

1000곳 이상 작곡··· 자면서도 곡 쓰는 버릇있어 아내가 걱정한다

-싱어송라이터인데 몇 곡이나 만들었나. 자면서도 곡을 쓴다고 들었다.

“곡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1000곡 이상의 곡을 만든 것 같다. 그중에 음원으로 나온 곡은 70곡 정도다. 곡을 쓴다는 게 영적인 부분이 있어서 집중할 때는 무의식속에서 작곡이 될 때가 있다. 깨고 나면 생각이 안 나서 문제다.”

그의 음악을 굳이 장르로 말하면 록과 블루스와 포크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다. 젊은 시절 음악으로 호기를 부리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의 음악은 암울하고 우울했다. 지금은 밝아지고 싶다던 그는 위로가 되는 노래를 더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앨범은 몇 장이나 냈나.

“2001년에 1집 절벽/좋은꿈을 출시하고, 올해 12월에 5집이 나온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이다.”

진채밴드는 2001년 1집 ‘절벽’을 발매했다. 10년간 준비 끝에 2011년 2집 ‘자유’ 출시를 앞두고 2010년 디지털 싱글앨범으로 발표한 2집 ‘터닝 포인트’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다. 그는 영감이 오면 곡을 만들고, 공연하고, 편곡하고, 녹음하고 완성해 나가는 일련의 작업들이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라고 본다.

음악 활동을 해오던 그는 결혼 후 남매를 둔 가장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광고업을 해보기도 하고 10년 가까이 소위 ‘밤업소’일도 했다. 낮춰보던 트로트나 댄스곡들을 연주하면서 음악적으로 깎이고, 또 쉬운 것에 길들여지기도 하면서 일로써 음악을 하며 보냈다.

-결혼 후 경제적인 문제는.

“밤업소는 먹고살기 위해,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업소에서 하는 음악은 내가 생각하는 음악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고 싶었지만 취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게 너무 슬펐다. 손님을 위해서 반주를 하고, 손님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적으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밤일' 안하고 음악하면서 살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컸다. 자그마치 10년을 그렇게 보냈다.”

-음악에 대한 상실감이 컸겠다.

“그래도 현실 속에서 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좀 더 희망적인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음악을 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업소에서 일하냐고 물어온다. 그것이 음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이다. 나의 꿈은 여전히 온전한 나의 음악을 하면서 사는 거다.”

-가수 정진채에게 밥벌이란 어떤 의미인가. 펀딩은 많이 모였나.

“모든 이들이 그런 것처럼 밥벌이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다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꿈꾸는 중년으로 살고 싶다. 음악을 오래하다 보니 나의 음악을 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다. 5집 음반을 위해 펀딩을 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 주셔서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이제 곧 5집 음반이 나온다.”

-고향(논산) 후배 박경하 가수를 지원하고 있는가.

“고향이 같아서 더 애착이 가는 후배이지만 훌륭한 시노래 가수여서 팬의 입장으로 좋아한다. 또한 그의 2집 수록곡인 함순례 시인의 시 ‘밥 한번 먹자’를 내가 작곡하면서 더 친해졌다.”

-시노래 프로그램 ‘꽃피는 시’를 소개해 달라.

“진채밴드 3집 앨범의 제목으로 시작한 ‘꽃피는 시’는 나의 시노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CMB방송에서 동명의 프로그램으로 개발되기도 했는데 1년여 간 20여분의 시인을 모시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초대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60여곡의 새로운 곡을 소개한 바 있다”

-대전작가회의 시인들과 자주 교류하는가.

“대전작가회의는 내가 시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단체다. 그만큼 많은 시인들과 친하게 교류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가수 정진채. 사진=미디어붓DB

-노래 서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석신의 가을꽃, 함순례의 배꽃, 나태주의 풀꽃까지….

“서시는 소설 동주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별 헤는 밤 등과 함께 작곡된 노래다. 진채밴드 4집 음반에 수록돼있고 2017년에는 바리톤 고성현 선생님의 싱글음반에 수록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가수들이 부르기 원하는 곡이 됐다. 박석신 화백의 가을꽃은 그와의 프로젝트 ‘이름꽃시’에서 즉석 그림과 즉석 작곡으로 만든 노래다. 요즈음은 드로인 콘서트에서 박 화백과 듀엣으로 부르기도 한다. 함순례 시인의 배꽃송가는 작가회의 시노래프로젝트 도시락콘서트에서 만든 노래다. 함순례 시인의 따뜻한 감성이 스며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다. 나태주 시인의 국민시 풀꽃은 방송 ‘꽃피는 시’ 나태주 시인 편에서 작곡됐는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다. 많은 분들이 따라 부를 수 있게 쉽게 만들어진 곡이다.”

-대전시 정신건강홍보대사로도 활약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나.

“나의 시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고 느낀 것 같다. 나또한 그러고 싶어서 애착을 가지고 활동한다.”

-인디음악(인디음악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을 만들기 위하여 독립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그룹이나 밴드)의 고수다.

“고수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참 많이 부족하다. 그냥 한 길을 가는 쟁이로 봐줬으면 한다.”

인디밴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이기에 한다. 보통 그러한 것들을 사람들은 꿈이라고 부른다. '마이너리티'의 오래된 꿈이고, 가난하지만 진득하게 실현시켜 가고 있는 꿈이기도 하다.

-박석신 화백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달라.

“이름꽃시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림과 시와 노래가 함께 하는 공연으로 교육부 인기강좌로 채택돼 전국을 누비며 공연 중이다.”

-박 화백과 호흡이 척척 맞는다.

“오래 같이 하다 보니 마음이 잘 맞는다. 심지어 서로 닮았다고 하는 분들도 많다. 시와 노래와 그림으로 칡넝쿨처럼 엉켜 살고 있다. 그와의 일들이 즐겁다.”

내 꿈은 처음도, 마지막도 음악을 하며 사는 것이다

-대전 대흥동과의 인연은

“고향 논산에서 20년을 살고 그 후 30년을 대흥동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흥동은 나의 예술적 고향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대흥동에서 살며 어울리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대흥동의 대전예술의 뿌리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 꿈은 처음도, 마지막도 음악을 하며 사는 것이다. 곧 5집 음반이 나올 것이고, 2019년에는 음반으로 나오지 못한 곡들을 최대한 음원화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또한 그동안 만든 곡들을 시가집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수 정진채는 변방일 수밖에 없는 인디음악을 고수하고 있다. 자본에 찌든 주류 음악의 ‘빵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한다. 이름 하여 ‘자작농’이다. 그는 이제 언더그라운드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나는 음악을 남긴다’라는 멋진 말로 인사하는 충청의 보헤미안, 진채밴드 리더를 보며 프레디 머큐리의 비트가 떠올랐다. 그와 막걸리 한 잔 나누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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